청년에게 "가능성"이 있나요?

<경제적 존재 너머 청년의 정체성 상상하기> 이후 토론

by 스드즈모임

박해명

제가 원래 관심 있는 주제가 ‘청년’은 아니었는데, 마음건강, 정신건강에 관한 글을 적으면서 청년성과 맞닿는 지점이 있어서 오늘은 ‘청년’에 관해 함께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제 <로컬에서 청년하다>(2021년)이라는 도서를 읽었어요. 청년정책에 관한 이야기, 지역 네트워크 확산, 정책의 한계 등이 나오는데요. 저와 다르게 세 분은 풍성한 경험을 해보셨을 것 같아요. 첫 번째로 나눠봤으면 좋겠는 건요. 지금까지 청년정책과 관련해서 어떤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시고, 어떻게 느꼈고, 지금은 어떻게 정리됐는지 궁금합니다.

조국인

저는 원주청년생활연구회 시작부터, 원주문화재단에서 2017년 설래발 사업을 하면서, 당시 박근혜 정부였을 때 전국 청년 활동가들 10~12명이 모여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연구하는 청년 사업 관련해서 ‘라운드테이블’을 한 적이 있어요. 청년융성위원회였을 텐데요. 그때 저는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한다고 의견들을 이야기했는데 그분들이 받아들였을 때 나의 얘기가 조국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강원도의 청년의 흐름은 이런 거구나, 원주의 지금 경향은 저런 거구나, 약간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저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얘기했을 때 지역성을 갖고 듣게 되는 느낌을 받다 보니 약간 경계했어요.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하지만, 누군가는 우리 지역의 이야기로, 대표성을 띠면서 받아들여지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누군가는 이런 자리들에 계속 나갈 텐데 적어도 우리가 우리 지역의 흐름과 생각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면서 원주문화재단에서 ‘청년창의포럼 설래발’을 진행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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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래발 사진.jpg
청년창의포럼 설래발(2017)


최소한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6회차 동안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년 활동을 지역에서 계속해나갔었어요. 몇 년 동안 이야기를 듣고, 자리가 있을 때마다 요구하거나 이야기했지만, 한 2~3년 지속되면서, 이야기를 해도 바뀌지 않으니까, 피로감들이 쌓이더라고요. 매번 자리는 찔끔찔끔 생겨요. 정기적으로 모여서 청년 네트워크처럼 이야기하고, 쌓이고, 이후 요구내용이 되고, 피드백이 오는 게 아니라, 1년에 갑자기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하고 토론회처럼 한 번 생기고 마는 거예요. 그 자리에 오는 사람들도 나오는 얘기들도 비슷해요.


어느 순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지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고요. 그래서 청년기본조례가 생겨도 바뀌는 게 없어 피로감들이 계속 쌓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청년 활동의 방향성을 많이 고민하게 됐고, 청년 활동으로서 얼마나 의미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필요성과 효능감의 균형이 잘 이뤄지기 어려운 것 같아요. 기본법 제정 이후 무언가 만들어 달라고 요구를 하는 것 이상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초창기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는데, 몇 년 차가 쌓이다 보니까 그게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데서 피로감이나 한계들이 생겼던 일련의 과정이 있었죠.


박해명
원주에서 청년성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있었나요?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주로 어떤 사람이었어요? 물론 그걸 정의하기도 쉽지 않았을 테지만요.


노주비

분야별로 문화기획, 청년 농부, 소상공인, 대학생 등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이혜윤
대표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그만한 청년들에게 책임을 주는 게 되게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청년세대를 미성숙한 존재로 보고 있잖아요. 만약 청년에게 성숙한 상태를 기대한다면 이 사람들에게 대표적인 책임들을 주기가 어려워지고요. 청년들에게 중요한 자리와 책임을 줄 때 이들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그리고 할 수 있는 역할이 늘어날 텐데, 이건 제한된 상태로 필요성만 요구되고,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책임을 주지 않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이 크죠.

노주비
제가 처음 청년으로 호명되고 저도 저를 청년이라고 인지했던 순간은 원주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지역문화 전문인력 양성사업 <G지대 프로젝트>로 지역의 문화기획자를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참여자로 들어갔을 때에요. 이건 2017년도 당시 원주문화재단의 대표이사님께서 청년들을 왜 지원해야 하는지 당위성이 내부에서 인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강승진 실장님이 추진한 거였단 말이죠. 한쪽에서는 쟤네한테 왜 돈을 줘가면서 저런 걸 해야 하는지 약간의 의심과 시각으로 보고 있을 때 강승진 실장님은 우리가 그들한테 지원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고, 이렇게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들을 저희의 입을 통해서 발화하게 요청했던 말이죠. 강승진 실장님이 설득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까 당사자 얘기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한 2~3년 동안에 그 언어를 습득해서 발화했는데, 그게 진짜 내 언어가 아니라 이렇게 얘기해야지 내가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상태로 말했어요. 어쨌거나 지역에서 청년으로 호명되고 청년활동가의 대표성을 띠는 자리에 다니기 시작했는데요. 이 자리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청년이란 건 무엇일까,라는 일종의 현타가 왔어요. 그 자리마다 요구하는 것들이 다 다르잖아요. 사실 그들이 청년을 불렀을 때 대다수의 청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만약 이대남, 이대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면 커뮤니티 들어가서 보면 되잖아요.


결국, 제 역할과 위치에서 생각했을 때, 예를 들어서 제가 원주시청소년육성위원회에 유일한 청년위원으로 들어가 있단 말이에요.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을 때 지역에서 청소년을 육성한다는 건 결국 이 청소년들이 지역에 정착해서 미리 터를 잡고 청년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지금 청년활동가들이 갑자기 어느 순간 짠하고 청년이 돼서 나타난 게 아니고 지금 원주에서 활동하는 청년활동가들 중 원주 출신인 대다수가 다 고등학교 때 청소년 활동을 했던 친구들이란 말이에요. 청소년 활동이 기반됐기 때문에 원주에 남아 일을 하고 있고, 청소년 때부터 학교 바깥으로 나와 이런저런 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위원회에서 이야기했죠. 그러한 자리에 갔을 때 사회 시스템 안에 견고한 틀 바깥에서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이왕이면 이 발화 권력을 가지고 소수자의 이야기를 하고, 그 소수자의 이야기가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잘 살아가는 맥락과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박해명

그러면, 자신이 청년으로 특정한 대표성을 요청받거나 대변해야 하는 역할을 요구받진 않았어요? 나라는 한 존재의 의견과 특정한 정체성을 대표한다는 대표성 사이에서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조국인
그래서 <설래발>을 통해 청년들의 데이터를 확인하고, 청년들과 일기 쓰는 모임, 잡메이커 등을 운영하면서도 데이터를 많이 보는 편이에요. 예전부터 사회조사, 전수조사 등 데이터를 보면서 스스로 체감하는 영역이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인식하는지 교차 검증을 하는 편이에요. 지금도 원주시에서 ‘청년정책 네트워크’도 하지만, 청년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물으면, 사실 사람들은 삶에서 그렇게 깊이 고민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대답 자체도 표상적인 대답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의 의미가 예전보다 작아진 건, 어차피 질문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길 가다가 아무나 원주에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냐고 물어보거나 천 명이 모여서 나오는 자리에서 나온 대답을 저는 너무 잘 알 것 같아요. 바로 교통문제, 문화, 놀거리 문제, 일자리 문제 등 이 3개가 분명히 나올 거거든요. 이 3개를 벗어나기가 어려워요. 근데 오히려 이렇게 매번 반복되는 답변을 살펴보면서, 이 대답이 지역에서 청년들이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다시 질문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혜윤

한 사람에게 대표성을 주고 그걸 듣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오류인 것 같아요. 그래서 FGI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이것도 조사연구의 특정한 단계에서 어떤 특정화된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듣는 것이지, 다수 혹은 보편적인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청년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청년의 대표성을 가진 것처럼 주어지는 자리가 너무 많아요. 이 사람은 부모인 30대 남성의 문화기획과 관련 일을 하는, 즉 전체적인 맥락을 포함한 대표성을 가진 청년이라는 것, 성별, 나이, 하는 일, 고유의 특징 안에서 집중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대표성을 가질 텐데. 이걸 전체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면서 불특정 하게 모아놓는 것 자체가 오류인 것 같아요.

아직 미성숙하고 발전, 육성, 성장시켜야 할 존재를 전제로 깔고서 청년들의 필요를 찾잖아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거에 대해 증명하고, 항상 발전시켜서 쓰임이 되게끔 하는,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게 청년의 이미지가 돼버린 것 같아요. 청년이라는 단어를 딱 들었을 때 막 싱그럽다, 막 에너지 있다, 이런 느낌보다 뭔가 되게 모자란 것 같이 느껴지잖아요. 취업준비생 아니면 어떤 단계에 도달해야 하는데, 덜 되고 있는 느낌들이 끼어든 것 같아요. 그 단어의 어감에 말이죠.


박해명
최근에 UN에서 청년 나이를 65세까지 바꾸고, 중년 나이를 79세, 노년 나이를 100세까지, 100세 이상은 초고령으로 재정의할 것을 권고하고 있대요. 이제 사람들의 나이와 수명을 재고려했을 때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시기가 65세까지다,라고 하면서 정의의 맥락이 바뀌는 듯해요. 청년들이 가진 특성이 있잖아요. 어떤 특성에서 자신과 연결되는 느낌을 받는지, 나를 어떤 청년성으로 정체성화하고 표현하는지 궁금하네요. 스스로 청년의 어떤 정체성이 교차되고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나눠주세요.

이혜윤
저는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UN은 너무 선진국 중심이다,라는 한계점이 느껴져요. 연령의 확장? 마치 문학적인 느낌이에요? 청년은 언제나 꿈꾸면, 누구나 청년 같아질 수 있나? 세대적으로 나눠서 어떤 시기를 청년이라고 한다면, 너무 임의적인 느낌이에요. 어디까지 청년에게 필요한 것과 이들에게 가장 효용적인 것을 따져 보려면, 분류 자체를 계속 넓혀만 갈 게 아니라, 좁혀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수명에 따라 늘린다면, 분명 청년의 시기에 놓치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청년을 지원하는데, 65세까지 다 해준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오히려 더 좁혀나가면서 세분화하는 것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제 청년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제 부모 세대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동시에 청년이라는 정체성 안에 나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은 괴리가 있어요. 이제 공공적인 영역에서 청년이라고 하는 대표성에 저는 이제 빠지려고 하고요. 내 목소리가 더 힘 있게 실릴 수 있는 건, 젊은 부모 세대를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더 있고요. 저한테는 부모 됨이라는 정체성이 추가된 거지만, 이것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여성과 남성, 비혼과 기혼 등 한 사람의 정체성을 청년이라는 그룹 안에서도 세분화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국인
우리 사회에서의 정의와 정책적 정의가 달라져야 한다고는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고요. 문학적인 뉘앙스를 정책적 용어로 끌고 오려고 하다 보니, 우리나라도 청년의 연령대를 확대하려는 형태로 바뀌어 나가고 있잖아요. 제가 문화도시나 유네스코 창의도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위원회에 청년으로 포지셔닝돼서 들어가게 됐는데, 그 자리에서 요구받는 건 남들과는 다른 혁신적인 생각들? 청년의 생각은 어떻냐 등 요청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항상 혁신적인 걸 말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도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더 좋은 기회로 사용하려고 했어요. 특히 유네스코 창의도시에서 논의가 이뤄질 때 저는 독립출판과 관련해서 의견을 냈었어요. 청년성으로 용인될 수 있으면서 주류적이진 않은, 보편적인 청년들의 이야기보다 전향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일부로도 발언했죠. 보편적으로 청년들이 독립출판에 관심이 있진 않거든요.


노주비

저는 청년 안에 여성, 페미니스트, 비혼주의자, 문화기획자, 기후위기 등 제가 관심 있는 주제와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대 안에서 이야기해 왔어요. 이전 세대보다 지금 청년 세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담론에 관심 있고, 주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에요.

이혜윤
분명히 기후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보다 당사자성을 가지고 있어서 전 세대보다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죠. 제가 참여하는 그린피스에서는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도 이제 기후위기를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되게 전향적이에요. 주로 중·장년보다는 청년들이 훨씬 많은데. NGO 중에서도 수평적인 문화로 운영되고 있는 조직이면서 청년 세대에게 권한을 많이 주고 있어요. 거기에서 활동하는 방식을 보면, 조직 내부가 열려 있다고 느껴져요.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이를 수용하는 과정이 수평적이다 보니까 조직 전체적인 방향성이나 메시지도 젊은 뉘앙스가 녹아 있게 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청년 활동가들이 주도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죠.

박해명
대표성을 확장하고 자기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책임과 직무가 주어져야 되는데, 청년센터를 운영하는 데에 센터장은 누구를 세울 것이냐, 경험치 혹은 역량을 살펴볼 때 청년이 되기가 어려운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 있었고요.

조국인
두 가지 트랙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청년으로서 단독적인 권한과 역할들을 주는 것. 두 번째는 청년청이라든지 청년지원센터 등 보편적인 청년들의 생각과 의사를 모아내는 작업을 잘 해내야 하는데, 그것이 다양한 세대나 계층 안에서 이뤄져야 해요. 청년센터에게만 그 역할이 주어지면, 어떤 한구석에 몰아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우리가 그런 얘기도 하잖아요. 여성가족부에서 성평등 정책을 추진하지만, 기획재정과 라든지 아니면 특히 시청 같은 경우에도 기획예산과 안에 그 정책이 녹여 있어야 해요. 성평등 정책이라는 건 어떤 한 과의 정책이 아니라 시청의 모든 정책에 녹여져야 의미가 있는 건데, 한 독립된 부서나 독립된 과에 배정됐을 때 장점이 있지만, 때로는 단점으로 한계를 만들어 만들어버릴 수도 있죠. 지금 원주시도 청년정책은 복지과가 맡다 보니까 갖는 한계들이 분명히 있고요.


박해명

청년센터가 복지과 안에 있다 보니 복지적 시선에서 프로그램, 정책이 나오는 것 같네요. 오히려 초창기에 접근할 땐 청년 거버넌스로 소상공인, 문화기획자, 대학생, 농업 등을 모았다고 했는데, 복지는 전혀 다른 맥락이 나오는 것 같아 과거의 흐름이 지금과 잘 맞닿아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주변을 돌아보셨을 때 또 다른 청년의 특성과 위치, 배경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지 궁금하고요.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 청년에서 정상성이 무엇이냐? 정상성에 탈락한 혹은 소외된 주체를 발견하시거나 또 발언하시면서 행동하셨던 것이 있다면 소환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국인
청년정책도 일자리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다면 정의 자체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고, 다양한 자리에 참여하면서, 청년이라는 시기는 자기 정체성과 자기 메시지를 확립하는 시기다,라는 데에 공감되고요. 물론 자기 메시지를 확립해 나간다는 말에 의미가 여럿 있을 것 같은데요. 자기 삶의 철학, 경제적 영역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회의 한 주체로서 오롯이 자리매김하는 시기.


만약 정책적 용어로써 정의 내렸을 때 저는 준비의 시기까지 청년의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소외될 수 있는 지점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들어가 있는 일을 하는 청년들이 정책적 수혜자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한계예요. 정책적 정의 안에서 수혜자들은 대부분 대학 시기에 있거나 아니면 대학 이후에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과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기 고민을 할 충분한 시기를 갖지 못한 채로 취업 전선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정책적 고민을 해야 하는지 싶더라고요. 그럼 그들은 어떻게 자기 메시지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수 있을까 고민이 들더라고요.

노주비

정책에서 이야기하는 청년의 이미지가 비장애인 남성, 어떤 직장을 갖고 일하는, 아니면 대학생이든 취업 준비를 하든 어떤 이행기에 있는 즉, 사회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가는 이성애자, 직장인, 남성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서 탈락되어 있는 것 중 하나는, 여성 청년 중에서도 비혼모가 생각나요. 시기상으로 청년이니까 결혼해서 육아하는 전업주부일 수도 있고요. 그들도 나이가 들면, 다 청년이 되잖아요. 그런데 청년 정책으로 접근했을 때는 이게 딱 떨어지지 않잖아요. 청년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여기서 발생하면서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이혜윤
사각지대라고 느끼는 건, 기혼 정상여성이에요. 여성이 취업을 준비하지 않고,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결혼한 뒤 출산하고 나서는 경력단절 여성으로 묶여요. 청년에서도 탈락되고, 정상류를 밟아가고 있지만, 어느 순간 사각지대로 넘어가버려요. 저도 프리랜서, 사업자를 가지고, 취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기를 낳고 육아휴직이나 출산급여, 휴직급여가 없잖아요, 1인 자영업 하시는 분들은 아이를 낳으면 거기는 아예 문을 닫아야 하고요. 거기에 깔린 맥락은, 남편이 벌 테니까. 사회가 그들을 정상 범주로 여길 때 오히려 소외되는 영역이 생기지 않나 싶어요.


저도 미혼모와 관련해서 최근에 본 게 있는데요. 잘 살아가는 미혼모들이 나와서 일반적인 사회적 시선을 거부하는 흐름이 있더라고요. 능력 좋고, 혼자서 아기를 케어하면서, 지원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시는 분들이 그룹화해서 목소리 내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이게 악용되기도 하더라고요. 이러니까 미혼모를 지원해 줄 필요가 없다고. 여성 혐오가 팽배한 경우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부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조국인

미혼모, 자립준비청년, 가족 돌봄 청년, 정신질환 청년 당사자 등 탈락된 주체는 꾸준하게 나타나고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즉, 정책적 정의를 우리가 다시금 고민해야 해요. 청년 정책으로서 바라봤을 때 우리는 어떤 영역까지 이 안에 담을 것인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죠. 아까 말했던 청년정책위원회를 참여하면서도 늘 느끼는 건, “엄마도 청년이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우리가 정책적 범위 내에서 어디까지 포용할 것인지 제대로 논의되지 않다 보니 정말 끝도 없어요. 이러다 보니 일자리 정책 이상의 것이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을 청년 정책으로 포괄하기엔 분명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고민할 필요가 있죠.

이혜윤
부모님이나 아픈 형제를 돌봄 하는 청년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데, 제 친구 중에 있었어요. 한 친구가 어머니가 암 투병하실 때 취업이 확정됐지만, 회사를 들어가지 않고 3년 동안 병원에서 간병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미국에서 만났는데, 가족이랑 연을 다 끊었대요. 한 사람이 간병을 전담하면, 다른 사람들은 한 사람의 고통이나 감당하는 책임에 신경 쓰지 않고 살면 되잖아요. 도리어 이제 자기는 미련 없어서 좋다면서, 자신이 아빠를 안 볼 권리가 있고, 떳떳하다, 스스로 새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 나눴어요. 미국으로 와서 일하고, 지금도 미국에서 자리 잡고 잘 살고 있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우리 사회에서 놓쳤던 사람인 거죠. 3년 동안 고립된 존재였어요.

박해명

청년이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특정한 정책적 단위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소외되는 일들이 있는 것 같네요. 더해서 일자리나 혹은 창업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그걸 지원하는 정책과 사업은 잘 세팅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정말 견고하게 잘 되고 있는지, 청년에게 취업하면 몇 개월 동안 50만 원을 주는 경제적 인센티브가 충분히 유효한지 궁금하네요. 오히려 실패를 경험하고, 정상에서 멀어졌을 때 이들을 다시 정상의 궤도로 올려놓는 정책은 유효할까 싶고요. 혹은 또 다른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과연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어떻게 잡아낼 수 있을까, 청년정책만으로 가능할까, 그런 고민이 드는 것 같아요.

노주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할 수 있는 청년은 누구인지 보는 것도 중요해요. 2018년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로컬크리에이터 관련 사업에 선정돼서 그 커뮤니티에 처음 들어갔어요. PT 발표를 들었는데, 사무실, 공간 임대 발표를 하더라고요. 한 심사위원분이 질문을 던졌어요. 사무실 임대료는 어떻게 구할 거냐고. 한 분은 상가 소유가 엄마이고, 한 분은 친척이라면서 저렴하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거죠. 결국 창업을 도전할 수 있는 청년들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자본이 기반되어야만 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 해도 원주에 부모님이 계시고, 제가 생계가 끊겼을 때 금전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 저마저도 지역에서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조차 안 되는 사람은 아예 도전해 볼 수 없는 환경이잖아요.


2018년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로컬크리에이터.jpg © 네이버 블로그(강릉희수)


작년에 일이 한창 끊겨 생계도 위태로웠을 때 제가 돈을 버는 방법을 찾아봤었어요. 한화소셜 유니버시티였나. 하나은행에서 대학생이랑 창업 준비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교육 사업을 하는데. 교육을 수료하면 100만 원을 주는 거예요. 제 사업 모델도 진단하면서 컨설팅도 받으면서 100만 원을 받아서 도움이 됐어요. 꼭 실패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그런 사업들이 다음 단계를 기약하도록 도움이 됐었죠.

이혜윤

정상성에 대한 지원 그리고 취업하고 주류에서 생존하기 위한 지원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문화적, 예술적인 것을 통한 다양성도 좋지만, 어떻게 보면 국가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한정된 것으로 선택과 효용을 따져 운용해야 하는 조직으로서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주류를 바꾸거나 주류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우리 사회가 이때까지 취해온 방식은 고립이었단 말이죠. 다양성에서 탈락이라는 말이 불편해서 다양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가진 존재들을 우리는 대부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지원했어요. 장애인 센터를 만들고, 그 사람들이 이 사회에 섞이지 않게 최대한 분리하는 방식 말이죠. 그 사람들끼리만 있게 하고, 최대한 사회와 멀어지게 해서 주류에 있는 사람들이 최대한 잘 분리하는 게 좋은 정책인 것처럼 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얼마나 주류 사회로 포함시킬 수 있는지의 방향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낳은 부작용과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의 기저에 분리가 있는 것 같고요. 특수학교 등과 같이 정상성을 유지하는 사회 시스템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분리하는 거지, 진짜 그들을 위한 게 아니잖아요. 그들이 얼마나 사회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 장애인들을 분리시켰잖아요. 장애인 지원에 있어서 취업 지원 정책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장애인들만 일하는 기관, 회사가 생기는 것보다 장애인들이 사회 안에서 기능하는 가능성을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조국인
원주의 청년정책이 일자리 정책이어도 상관없을 수도 있어요. 대신 그들이 충분하 고민을 통해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지점까지 담보해 주는 정책이냐 이거죠. 서울은 청년 정책에 있어서 주거 정책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원주는 <설래발>을 하면서 느꼈지만, 주거 정책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는 아니에요. 우리가 정책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게 반드시 기계적으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정책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어디에 두는지 고민하는 게 필요해요. 그래서 대학교나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1년 동안 충분히 자기 탐색과 자기를 고민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갭이어 정책을 추진해서 분산되어 있는 정책적 예산을 하나로 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실패를 완충하거나 실패를 딛고 나갈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할 수도 있고, 자기 탐색의 시간을 통해 자기 메시지를 확립해 가는 시기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지금 전국에서 6개월 동안 50만 원씩 지원하는 국민취업지원제도가 서울에서 맨 처음 시행했을 때는 시작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서울은 60만 원씩 지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역별 거점 센터에서 진행하는 커뮤니티 활동을 참여해야 하는 조건이 있어요. 돈을 지원해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들이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계기들을 만들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을 만남으로써 공감과 위로를 얻는 부분, 사회적 관계를 확장하는 의미가 컸어요. 되게 그럴싸해 보이는 선진 사례만 가져오잖아요. 사실 더 중요한 건 왜 이 정책이 시행됐는지, 이것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었는지가 더 필요한 고민이 돼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잖아요.


국민취업지원제도.jpg © 네이버 블로그(탐디자인)


이혜윤
청년 취업의 성과지표가 취업률이다 보니 어떻게든 취업률만 올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아닌 질 낮은 일자리로 계속 밀어낸다면, 이건 지원 안 하는 것만 못 한데 말이죠. 이러한 부작용이 발견될 때 우리가 어떤 성과지표를 갖고 이 사업을 평가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6개월이 늦어지더라도 이때 한 것보다 더 나은 일자리로 갈 수 있다는 성과를 측정해야 하는데, 사업은 일단 시작했고, 지표에 맞춰 끼워 넣는 방식이 상당히 아쉬워요.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그걸 보고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어서 촘촘하게 설계했으면 좋겠어요.

노주비
저는 실패 수당 같은 게 있으면 좋겠어요. 취업 루트에 있는 사람들은 실업급여를 받잖아요. 어떤 직장을 그만두고, 다음 직장에 가기까지의 기간에 실업급여를 받는데. 저는 실업급여를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단 말이에요. 저는 활동 초반에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4대 보험을 가입하지 않았고, 그다음 관광두레 PD를 했을 때도 기타 소득으로만 받았고, 지금 우주비행으로 개인 사업자를 내서 쭉 하는데, 일련의 과정에서 몇 번 다음 단계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어떤 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에 생존에 대한 불안 혹은 그다음 단계로 가는 데 있어 금전적인 지원이 없어서 불안했어요.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있어서 기간이 걸리고 비용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다음 단계에서 나는 이런 걸 고민할 거다,라는 증빙이 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을 할 수 있도록 특정한 수당을 매달 일정한 기간 동안 지원해 주는 거죠.

조국인

현재 육아휴직도 만 8세까지 1년 동안 나눠서 쓸 수 있어요. 꼭 1년을 쭉 써야 하는 건 아니에요. 출산 휴가 3개월만 하고 바로 복귀한 다음에 초등학교 1학년 때 쓰는 경우도 많아요. 이처럼 일정 기간을 두고 기본법에서 정한 만 34세까지 국민 누구나 1년이라는 시간을 주는 거예요. 탐색의 시간의 명칭을 단순히 갭이어라 한다면, 내가 만약에 중간의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면, 신청한 뒤 증빙해 나가면서 그 시기에 맞는 수당을 받는 거죠.


육아휴직(출처-하얀솜구름의 구름공방).png © 네이버 블로그(하얀솜구름)

박해명
증빙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들으면서 고민되긴 했는데요, 대부분 교육 방식들이 일주일에 5일을 다 7시간, 8시간 다 가야 되거든요. 탐색이 없고, 너무 힘들어요. 보통 정해진 일정 동안 전문적 지식을 쌓고, 그다음에 실습 현장 혹은 매칭을 통해 경험을 쌓고 이후 교육비를 받는 방식으로 세팅되어 있거든요. 일주일에 이틀 정도 교육을 들으면서 숙소에 머물거나 이후 원래 있었던 지역에서 뭔가를 할 수 있게끔 하면 좋겠어요. 이틀만 잘 참석해도 수당을 주고, 거기서 자기계발하는 시스템도 만들고, 자기 계발에 대한 정량지표를 꼼꼼히 설정하면서 삶의 이행기에서 배움과 알아감을 돕는 지표가 설정되면 좋겠어요. 결국 교육현장을 떠나 그가 어떻게 해내는지에 따라 달렸다고 보거든요.


이혜윤
배움에 관해서는 아주 충분치 않지만 그러한 지원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더 시도에 가깝게 새롭게 배우는 시도 하다못해 유튜브를 개설했고, 이걸 해볼 거라고 할 때 얼마큼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시기를 메꿔주는 게 추가되면 좋겠어요. 유튜브를 개설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영상 올리고 있다는 것으로 준비를 하는 거죠. 일주일에 하나 올리는 것도 쉽지 않고요.

노주비
수당을 지원하면, 증빙하고 성과를 까다롭게 볼 거 아니에요. 이전에 면접도 보고, 그러한 과정이 있을 거고요. 그렇게 해서 뽑았으면 그 이후에 잘할 거라고 믿어주면 좋겠어요. 그래서 증빙을 여유롭게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조국인
만 19세부터 34세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1년의 기간을 주는 거죠. 신청을 하면은 그 시기에는 자신이 쓸 수 있는 간단한 보고서, 자기 아카이빙을 위한 내용이랄까요? 혹은 진짜 기본소득처럼 신청하면 일정 기간 동안 증빙 없이 아예 주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이혜윤
만약 증빙 없이 한다면, 실제 정책을 살펴봤을 때 다수에게 적은 금액을 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얼마만큼은 허들을 얕게라도 줘서 진짜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으로 체감되도록 하면 좋겠어요. 모두에게 10-20만 원 줄 바에야 약간의 증빙을 하고 100만 원씩 주면 어떨까요.

조국인
그런데 지금 50만 원씩 6개월을 다 주고 있잖아요. 50만 원씩 1년을 조건 없이 모두에게 주는 형태 혹은 최소 100만 원씩 1년을 주는 정도랄까요. 어차피 청년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기본소득도 물론 저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러 단계에서 낭비되는 복지 예산들을 하나로 모아서 기본소득으로 주자는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한 번쯤은 고려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요.

박해명
마지막으로, 청년과 관련된 사업을 제안한다면, 생각나는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청년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기후위기일 수도 있고, 주비 선생님께서 최근에 강의를 맡으신 무위당학교에서 진행하는 청년학교도 있고요. 혹은 특정 단체나 중간지원조직에서 갖고 있는 콘텐츠가 있잖아요. 거기서 청년과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원주에서 토지문화재단에서 <2022 장애 예술인 육성 프로그램> 사업을 진행할 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예산적 지원과 토지문화재단의 레시던시와 원주시그림책센터의 그림책 콘텐츠가 만나 장애 예술인을 육성하는 것처럼 다양한 주체가 만나 청년성에 대한 사업을 운영할 수 있지 않겠나 싶더라고요.


2022 장애예술인 육성 프로그램.jpeg © 네이버카페(망고우드)


조국인
다양한 중간지원조직이나 단체가 청년들과 결합했을 때 다양한 것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무의당 학교와 같은 경우에도 무의당이 지닌 가치들을 새로운 세대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연결해 나갈 것이냐. 이어나갈 것이냐 말이죠. 환경운동연합도 마찬가지로 청년학교를 연다든지 아니면 청년 그룹에서의 활동을 연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고요. 기존의 단체나 조직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과 해석들을 확인하고 연결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마련될 것 같아요.


현재 원주의 청년 네트워크도 있지만, 시 직영이기 때문에 수동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긴 한데, 이전 시정보다 거버넌스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인 것 같은데요. 지난 시정에서는 정책위원회도 거의 안 열었고, 위원회를 겨우 만들기만 했는데, 이번 시정은 네트워크도 만들었고, 정기 모임도 하고, 축제도 하고 정책 발표도 하고요. 그런데 단편적인 측면에서 그치는 주제가 아쉽더라고요. 시의 경향성과 맞아야 하고, 주류적인 흐름들과도 맞닿아야 하다 보니 원주시 청년센터는 광의적으로 접근해 나가는 방식을 계속 취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여러 대학교와 연계한 포럼 자리나 공론장이라든지 말이죠. 그들의 의사들이 모여지고, 이후 정책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공론장을 만들어가는 역할은 공공의 영역에서 해야 할 지점이에요. 제대로 된 공론장의 역할들을 구축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해요.


무위당학교_청년학교(1).jpg
무위당학교_청년학교(2).jpg
© 네이버 블로그(그냥그대로)


각 조직과 단체들이 그들의 가진 가치와 방향성으로 청년들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움직임들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해요.


이혜윤
모순은 거기 있다고 봐요. 공론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 이런 것들은 경향성이 있는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봐요. 어떤 단체든 정당이든 간에 각자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이 있잖아요. 그렇기에 그들이 여는 공론장은 내부만의 공론화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시가 네트워크를 만들고 직접 운영하는, 위원회를 만들 때 과연 누가 그 자리에 오든 누가 집권을 하든지 공정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발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될까,라는 의문과 한계로만 끝날 것 같아요. 결국 전문가, 혹은 중간지원조직, 이것을 할 수 있는 당사자들에게 폭넓게 지원하고, 거기에서 잘 된 사례, 성과를 치하하고 색깔에 상관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노주비

다른 맥락을 살펴본다면, 지금 시민단체들의 활동가 재생산이 전혀 안 되고 있잖아요. 지금 청년들이랑 연결이 아예 끊어져 있어요. 특별히 어디서 체감했냐면, 작년 원주시민운동가상 시상식이 있어서 갔어요. 1회부터 지금까지 매년 시민운동가를 시상했던 정보가 연도별로 나와 있는데, 그게 2,000년대에 시작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분들이 다 있어요. 그때는 그분들이 청년이었고, 이젠 아니란 말이에요. 20년이 지났는데 새로운 활동가가 전혀 발굴되지 않고요. 그분들이 지금은 대표, 관리자급에 있는데, 그 밑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곧 무너지잖아요.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왜 청년들이 우리에게 안 올까,라는 고민을 하는데, 자기들이 만나러 가야죠. 청년들이 어디에 모이고, 관심 있는 친구들이 누구일까 보면서 찾으러 가야죠.

이혜윤
좀 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가치적인 이야기는 그만하자고요. 필요에 맞게 찾으러 나서고, 필요에 관해 실용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위주로 일단 시작해야지, 언제까지 가치 타령하면서 있겠어요. 요새 불교가 잘하는 것 같은데요. 자기네들이 젊은 사람이 필요하면 디제잉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안 맞다고 여기면서 청년 세대와 마주하지 않으면, 그건 급하지 않은 거예요. 진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면 방식을 바꿔서라도 실용적으로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는 고민을 해야죠. 실용적인 접근이 없다면 이건 괴멸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고요. 사람들이 가진 기득으로 청년에게 태도를 요구하고, 가치를 요구하는 건 일하는 방식엔 맞지 않아요. 훼손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이고, 그런 관점에서의 다양하게 수용되는 형태로 실용적으로 접근했으면 좋겠어요.


박해명
아까 말씀하신 시민운동가를 시상했을 때는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상관없었겠지만, 이젠 젊은 사람들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시민운동이라는 범위를 소셜벤처와 같이 더 확장시키고, 신인상처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만약 수상하는 사람들이 구분하지 않으면, 젊은 사람이 드러나지 않고, 그 세계를 탐구하기가 어렵고, 관계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상의 범위 자체를 몇 년 차 이내의 활동가로 하면서, 새로운 청년들이 그 안에 결합할 수 있게끔, 이에 대한 명예를 충분히 전달하는 방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마무리하고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박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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