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소고(六十小考)

'살 만큼 산' 육십, '한창의 시작'인 육십

by 숲속의 고목나무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환갑을 맞은 것은 내가 초등학생 때였다. 그날을 기억한다. 대소가 식구는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의 축하까지 가세해 제법 성대했다. 평생 음주 가무를 멀리하셨던 분이 그 독한 ‘삐루(Beer)'까지 마시고 어색한 춤사위를 선보였던 그날의 광경이 선하다. 아버지에게는 그만큼 기쁜 날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날은 훗날 당신이 묻힐 가묘(假墓)를 완공한 날이기도 했다. 오직 인력만으로 산허리를 깎고 무거운 비석과 상석을 산 위로 운반해 묘를 만들었던 시절이니 당시로서는 꽤 큰 공사였다. 그날로부터 약 이십 년 후 아버지는 그곳에 묻히셨다. 그로부터 또 삼십 년이 지나 이제 내가 환갑 나이가 되었다. ‘육십’의 의미가 아버지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살 만큼 산’ 육십이었고 이제는 ‘한창의 시작’인 육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을 깨닫는 좌표로서 ‘육십’의 의미는 여전하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의 물결을 밀어내는 것(長江後浪催前浪)처럼 나도 이제 서서히 세상의 물결에서 밀려나는 나이가 된 듯하다.


올여름에는 큰비가 내렸다. 십 수 년 만의 폭우라고 한다. 황톳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TV 속 가축들의 몸부림이 애달프다. 물살에 떠내려가는 생명체는 안간힘을 다해 탈출하려고 한다. 그렇게 속절없이 떠내려가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이없는 죽음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리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사실은 세월의 물결에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유유자적해 보이는 이 물살이 앞으로는 차츰 빨라지고 다급해질 것이다.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저 하류에는 분명 죽음의 폭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 폭포가 시야에 들어올 즈음에는 나도 TV 속 가축처럼 버둥거릴 것이다. 결국에는 그곳으로 떨어지고야 만다는 사실 앞에 어떻게 초연할 수 있겠는가. 육십은 그런 나이다. 아직 그 폭포가 보이지는 않지만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는 흐릿하게 들려오는 그런 나이.


아버지의 삶을 내 인생에 단순 대입하면 내게 남은 시간은 이십 년이다. 그나마 마지막 오 년여를 병마에 시달렸던 아버지의 생애를 감안하면 의미 있는 시간은 더 짧아진다. 내 나이 서른에서 사십 중반까지, 또 그때부터 지금까지를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잠깐’이다. 그저 몇몇 사건만이 어슴푸레 기억날 뿐이다. 이렇듯 시간은 더뎌 보이는데 세월은 쏜살같다. 어쩌면 남은 시간이 이보다 더 짧을 수도 있다. 어렸을 적 가묘에 관해 아버지에게 했던 당돌한 질문이 기억난다.


“왜 아버지가 죽지도 않았는데 이런 걸 만들어요? 재수 없게!”


물론 아버지가 덜 여문 어린 자식에게 당신의 속내를 다 이야기했을 리 없다. 내가 그 연유를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게 된 것은 나이가 들어서였다. 미리 가묘를 만들어 놓으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음을 안 것이다. 물론 살아생전 가속들에게 보여준 책임감과 자식들에게조차 의존하지 않으려는 강한 주체 의식을 감안하면 장수의 욕망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노욕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다. 장수는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므로. 어쨌든 그 민간 속설이 맞는다면 내 수명은 더 줄어든다. 공들여 가묘까지 만든 아버지가 이십 년을 더 사셨는데 같은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 또한 앞으로도 그럴 여지는 없으니.


노인의학 전문가인 <마크 E 윌리엄스> 박사는, 저서 <늙어감의 기술(THE Art AND Science OF Aging Well)>에서 늙는다는 것은 추락이나 쇠퇴가 아니라 정점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잘 늙기 위한 일은 뿌린 대로 거둔다.'며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핵심은 '변화'라고 한다. 미사일이나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굼벵이까지도 가던 방향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어야 한다. 육십은 바로 그런 나이다. 지나온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뒤돌아보고 잘못된 궤도를 수정해 다시 떠날 채비하는 그런 나이.


노년은, 어떤 이에게는 혹독한 세월을 견뎌낸 보상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젊음을 탕진한 형벌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함부로 샴페인을 터뜨려서도 안 되고 쉽게 좌절해서도 안 된다. 삶은 우리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운명은 언제든 우리를 바꿔 놓을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우리 또한 언제라도 삶의 방향을 바꿔낼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니. 지금까지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었든 어쨌거나 나는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인생의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산을 오르고 노래 부르며 도서관으로 향한다. 또한 가족과 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사랑을, 마음에는 관대함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내 안에 덕지덕지 쌓여 있는 욕심의 찌꺼기를 비워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것이 올바른 ‘변화’였는지 여부는 훗날 내 인생이 말해 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