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글이 Mar 26. 2024

정리하기

  정리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다. 이때만큼 욕망대로 소비를 했던 시기가 있었을까? 2023년 동안은 유럽여행을 다니듯이 자유롭게 살았고 그 순간이 점점 끝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 작은 선물을 하고 싶어서, 친구들이랑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서, 출근할 때 입을 옷이 필요해서, 아직 신입이니까. 어느 날은 날이 추워서, 귀가 시려서, 보너스를 받아서, 세일을 하니까, 할인쿠폰이 아까워서, 내가 왜 참아야 할까 싶어서 망설임 없이 샀던 물건들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짐이 되었다.

  ‘공간이 조금만 넓었더라면, 어떻게 이사를 가야 하나, 자취하고 싶다.’     


  한정적이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작은 방에서 미니멀하고 비움의 여유를 갖는 것은 매우 귀찮고 어려운 일이었다. 봄맞이 세일, 골든 회원 쿠폰, 이벤트 알람,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욕망의 길 속에서 절제를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사고 보면 비슷한 디자인, 색감, 촉감, 같은 얼굴에 연보라, 아이보리, 하늘, 초록 니트를 바꿔 입으며 취향을 찾아보자. 서랍에 있는 모든 옷을 꺼내 침대에 올려두었더니 작은 산이 만들어졌다. 견고하지 못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작은 욕망의 산.     


  자유가 넘쳐나는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면 산 정상에 살고 있는 백호를 만날 수 있다. 강인하고 추진력이 넘처나 폭발적인 힘을 의미하는 백호살이 사주에 있어도 계속 쌓이는 무기력함, 언제쯤 올라갈 수 있을지 가늠만 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 소재가 유리, 시멘트, 나무인지가 중요할까, 저 위에 천장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나를 드러내고 어필을 해야 하는 자기 PR시대에서 비주류 게으른 방구석 글쟁이가 되고 싶어 한가로운 주말 오후에 작은 푸념만 쓰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이불을 꽁꽁 싸매서 저 멀리 들려오는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고 싶은 낮과 밤.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강인함, 채우지 않아도 풍족한 여유,  얼룩말 같아서 지겨워진 니트, 엉덩이가 껴서 못 입는 치마, 언젠간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입겠다고 사이즈 미스난 바지들을 보면서 환상 속에 갇혀 버린 욕망들. 언제쯤 이룰 수 있을지 모를 그런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하나씩 옷을 정리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