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여유(餘裕)로운 마음
한자, <마음>에 대하여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개혁 정치가였던 조광조와 동시대를 살면서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당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김정국이란 인물이 있다. 조광조가 죽임을 당했던 기묘사화 때 그도 화를 당해 낙향한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며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는데, '팔여(八餘)'는 8가지 넉넉한 것이라는 뜻이다. 한 친구가 팔여의 의미를 묻자 이렇게 답한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맡는다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그 말을 들은 친구의 대답이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다네.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을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고 여기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래도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그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여유'만큼이나 상대적인 개념이 있을까? 어떤 이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여유롭다 느끼고, 어떤 이는 꽤 많은 돈을 벌면서도 늘 돈에 쪼달린다고 느낀다. 여유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알 수 있다.
'여유(餘裕)'는 '餘'(남을 여)와 '裕'(넉넉할 유)가 결합해 만들어진 단어다. 넉넉함이 남아있는 상태라는 뜻한다. 餘는 食(밥 식)과 余(나 여)가 더해진 한자인데, 이렇게 보면 '내가 먹는 밥'을 뜻한다. 누군가는 밥 두 공기로도 부족하지만, 누군가는 밥 한공기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裕는 '衣'(옷 의)와 '谷'(골 곡)이 합해진 한자다. 넓은 계곡처럼 헐렁한 옷을 뜻한다 볼 수 있다. 같은 옷도 누군가에게는 헐렁한 옷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꽉 끼고 답답한 옷이다. 얼마나 많은 밥을 먹었든 얼마나 헐렁한 옷을 입었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내가 느끼는 감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나에게만 늘 부족해 보이고 남들은 다 있는데 갖지 못한 것들이 수없이 많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조금만 관점을 다르게 보면 나에게는 있지만 남들이 갖지 못한 것도 제법 많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미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어버리고, 또 내 마음에 여유가 사라져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억울하게 벼슬에서 쫓겨나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탄할 만도 했을 텐데, 그때 김정국은 오히려 팔여거사라고 칭하며 스스로 가진 것이 많은 넉넉한 사람이라 여겼다. 우리도 그처럼 스스로 팔여거사라고 칭해 보면 어떨까.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가끔 내가 좋아하는 치킨 한 마리 사 먹을 정도의 돈이 있고, 사랑하는 아내와 살갗을 비비며 잠을 자는 공간이 있고, 점심 식사 후 커피 한잔 마실 정도의 여유가 있고, 서가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넉넉히 꽂혀 있고, 주말에 가족이랑 교외로 나들이 갈 수 있는 붕붕이가 있고, 집 앞에는 하늘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고, 그 길 위로 함께 손잡고 걸어주는 아들 녀석이 있다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