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입술에 대해
이세벽
몇 달 전 이주해 온
(사실은 행성이 내게로 왔다.)
메니에르 행성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처럼 흔들렸다
늘 낮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지
나는
내 걸음은
내 껍데기는
메니에르 행성이 발작을 일으키면
솜씨 좋게 채로 후려친 팽이처럼
스물네 바퀴
이천사백 바퀴
이만 사천 바퀴
어쩌면 이억 사천 바퀴를
단숨에 돌아버린다
나는 눈을 찔끔 감고
머리를 메니에르 행성에 처박은 채
비명을 지르다
지구에서 보내온
멀미약과 신경안정제
따위를 삼키고 실신하듯
잠이 든다
깨어났을 때 메니에르 행성이 여전히
파도 타는 배처럼 흔들려도
구토가 멈추고
어지럼증도 멎고
행성이 돌면서 내던
굉음도 사라진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지구에서 딸의 목소리가
별의 속삭임으로 날아온다
아빠 엄마 립스틱 색깔 어때!
내가 사줬어. 아빠 마음에 들어?
그제야 지구에 서 있는
아내의 입술이 보인다
오월의 담장 위에서
치마를 한껏 펼치고
속살을 다 드러낸 채
유혹의 눈길을 보내던 장미처럼
깨물고 싶은 입술이다
하지만 아내와 언제 키스를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해
키스를 해봐야 알지
메니에르 행성에서 던진 내 말에
딸은 지구에서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인다
어쩌면 내가 사랑한 것은
아내의 입술이 아니라
립스틱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내가 지구에서
탐한 것은 단언컨대
립스틱이었다
색깔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물론 장미들이 광기처럼
속살을 드러내는 오월의 담장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내가 사랑한 것은
아내의 입술이 아니라
립스틱이었다는 것을
지구에 있는 딸에게
고백하고야 만다
어지럽고 구토가 나는
회한일 지도 모르겠다
지구로 귀환하기 전에
메마른 나뭇가지 같던
아내의 진짜 입술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사랑은 아름답게 치장해야 맛인데
사랑은 싫증 나기 마련인데
이제 와서 그게 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