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니에르 행성의 허언증

The Mythomania of the Meniere Planet

by 이세벽
율리GPT그림



메니에르 행성의 허언증

(The Mythomania of the Meniere Planet)


이세벽

메니에르 행성이 발작을 일으키면

웅웅웅웅웅 ......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장이 일고

뇌척수액이 출렁이긴 해도

눈을 질끈 감은 채

침대에 머리를 파묻으면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 너는 왜 하필 나에게 왔니?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도 부족해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메니에르 행성에게 물었다.


- 아주 오래전부터 네가 나를 불렀어. 마침 내가 지구별을 스쳐 가는 중이었거든.


- 너는 어디에서 사는데?


나는 비꼬듯 메니에르 행성에게 물었다. 내가 자기를 오래전부터 불렀다고 꾸며대는 걸 보면 진실을 기대하긴 애당초 글러먹은 것이다. 때문에 그 부분은 코웃음으로 무시하기로 했다.

- 138억 광년에서 왔어. 그러니까 나는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별이라고 보면 돼. 덕분에 지금까지 사멸을 피할 수 있었지.


메니에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 우주의 끝!


메니에르의 허풍에 할 말을 잃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데......


토할 듯 속이 메슥거려 떠오르는 대로 나는 지껄였다


- 하하 팽창하고 있는 것은 별이나 은하가 아니라 우주라 불리는 공간이야. 그런데 말이야 사실은 팽창하고 있는 게 아니라 번지는 거야.


- 번진다고!


나는 이불속에서 눈을 떴다가 얼른 감았다. 하마터면 이불을 들치고 팽팽 도는 놈을 쳐다볼 뻔했던 것이다.


언젠가 발작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였다. 내 눈을 들여다본 아내는 눈동자가 무섭게 돌아간다고 했다. 행성이 빠르게 도는 만큼 눈동자가 도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행성을 보지 않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고.

- 투명한 물속에 한 방울의 잉크가 떨어진 것처럼, 우주도 그렇게 번지고 있어. 다만 한 방울의 잉크가 떨어진 곳이 물이 아니라 너희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 경험조차 할 수 없고 인위적으로 조성할 수도 없는 완전한 무인 거야.


- 무!


나는 무에 대해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넓고 너른 우주 공간이었다. 별과 별 사이, 은하와 은하 사이의 그 드넓은 공간. 하지만 그 공간이 완전한 무는 아닐 것이다.


- 무에는 아무런 에너지도 존재하지 않아. 장애물도 없고 심지어 아무리 좋은 현미경이나 무엇이든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있더라도 티끌 하나도 찾아낼 수가 없어. 무엇보다 무는 공간이 아니야. 청정무구한(pristine void) 무인 것이지. 다시 말하면 무에는 끝도 시작도 없어.


- 끝없이 넓은 거네


나는 단순하게 우주 공간을 상상했다.


- 끝이 없기는 하지만 넓다고 말할 수가 없지. 내가 말했듯이 무는 공간이 아니니까. 하지만 네 말대로 끝이 없기는 하지. 무는 끝에 절대 닿을 수 없으니까. 그러나 시작도 없어. 무는 그냥 무야.


메니에르는 슬그머니 내 말을 수긍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끝이 없다고 한 건 정말 상상할 수 없이 넓은 공간일 뿐이었다. 이를테면 광활한 우주 공간!


- 그곳에, 그러니까 완전한 무에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응축되어 온 한 방울의 잉크가 떨어졌다 혹은 생겨났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아니 생겨났어. 청정무구(pristine void)에 티끌보다 더 작은 흠이 생긴 순간이었지.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어. 폭발한 게 아니야. 청정무구에 한 방울의 잉크 같은 우주가 번지기 시작한 거야. 생각해 봐. 무는 상상도 할 수 없이 건조하고 너희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텅 빔(absolute emptiness)이야. 한 방울의 잉크같이 초응축된 먼지가(an ultra-condensed speck of dust) 얼마나 빠르게 번졌겠어. 그렇게 생겨난 게 우주야.


- 그러면 암흑에너지라든지 암흑물질은.....


우주에 암흑에너지라든지 암흑물질이 있다고 한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우주가 갑자기 동력을 잃고 쪼그라드는 상상으로 몸서리치던 기억도 함께.


- 그런 건 없어. 우주가 팽창한다고 봤기 때문에 생긴 오해지.


- 그러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수축할지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


- 당연하지. 절대 수축은 없어. 오히려 바짝 마른 종이가 잉크를 빨아들이듯 우주를 무섭게 빨아들이는 중이지. 그러다 보니 우주는 자꾸 넓어지고 밀도가 약해져서 가속도가 붙어 더 빠르게 팽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너희의 관점에서는 그렇게밖에 볼 수 없기도 해.


- 우주의 밀도가 점점 약해지면 언젠가는 팽창이 멈추겠네.


나는 메니에르에게 허언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었다.


- 아니 절대 멈추지 않아. 끝없이 넓어질 뿐이지. 우주라는 한 방울의 잉크는 영원히 번질 거야. 바다같이 넓은 물속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하지만 무는 끝이 없으니까 무를 채우지는 못해. 그저 영원히 넓어지는 거지. 하지만 우주의 총량은 변하지 않아. 한 방울의 잉크만 할 때나 번지고 번져서 138억 광년 거리까지 번진 지금이나 다 똑같아. 물론 앞으로도 계속 넓어지겠지만 너희는 곧 사라져. 너희들에겐 긴 시간이지만 영원에서 보면 순간일 뿐이거든.


- 우리가 사라진다고?


나는 메니에르의 허언증에 넘어가버렸는지 조금 놀랐다.


- 무는 변함이 없지만 우주는 늘 변화해. 그것도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듯. 너희는 그 안에 있는 티끌에 불과해. 세포 한 조각보다 더 작다고 보면 돼.


- 그렇다고 왜 사라져?


나는 점점 메니에르의 허언증에 가스라이팅, 아니 브레인워싱 되고 있었다.


- 태양계뿐만 아니라 너희 은하가 몇 초 후에 완전히 없어질 테니까. 사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서 죽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태어나서 은하가 되겠지.


- 우리는 다 죽어? 이 문명이 사라지고 마는 거야? 그것도 몇 초 후에?


- 몇 초라는 표현은 영원의 기준이었어. 너희들 시간으로는 앞으로 수십억 년은 살아 있을 거야. 은하마다 수명이 다르긴 하지만 너희 은하는 대강 그래. 그리고 사실은 우주에 너희보다 훨씬 진보한 문명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은하와 함께 사라졌지. 너희들이 갈 수도 관측할 수도 없는 은하에 수많은 문명이 번성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영원의 시간으로 몇 초 안에 사라져 버려.


- 빛보다 빠른 우주선을 만들어 타고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존재는 없어?


나는 메니에르의 허언증을 신봉하는 팔로워가 되어가고 있었다.


- 없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절대 불가능해.


메니에르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 그럼 신은 없는 거야?


나는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사실 가장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 나는 돌덩어리에 불과해. 다시 말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보고 경험한 것들 뿐이야.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인데..... 무에 응축된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분이 있었을 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 .......


나는 알 수 없는 절망(despair)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다행히 곧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메니에르 행성의 허언증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다. 앞으로도 절대로 메니에르에게 말을 걸지도 않을 거고 그놈이 말을 걸어와도 대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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