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피형 인간이다.
어렸을 때부터 겁이 많았다.
빠른 년생이라 일찍 학교에 갈 수 있었음에도, 자기소개가 무서워 학교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 대수인가 싶지만, 그때는 그게 내 작은 세상의 전부였던 것 같다.
겁쟁이인 탓에, 완벽히 해내지 못할 것 같으면 열심히 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죽을 힘을 다해 공부했는데도 1등급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정지어지니까 일부러 공부를 설렁설렁 하기도 했다.
핑계 같이 들리지만 진짜다.
(대체 왜 그랬는지 아직도 한스럽다. 그렇다기엔 지금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갓난 아기 때는 다리에 화상을 입고도 울지도 않고 끙끙거리기만 했다고 한다.
그때 생긴 상처는 내가 "완벽한 회피형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내 종아리에 인장처럼 남아있다.
원래 아기는 배고프면 울고, 불편하면 울고, 아프면 울지 않나?
뭐가 그렇게 걸려서 속시원히 울지도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했을까.
인정하긴 싫지만, 정말 태생적인 무언가가 있나보다.
지금도 무서운 게 있으면 피하고, 불편한 게 있어도 입을 다문다.
문제는 그러지 않을 필요가 있을 때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일기도 마찬가지였다.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언제가 뒤로 미루게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나의 게으름이 그 이유인 것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이면에는 나의 하루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하루를 충실히 살았는가?
이 질문에 NO라고 대답할 날들이 너무 많아서, 차마 글로 남길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회피형 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기를 써보려 한다.
일기를 작성하며 나의 하루를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시작인 것 같다.
문제 인식이 문제 해결의 첫 단계이듯, 인정은 성장의 첫 걸음이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교양 수업에서 배운 중독 극복 그래프.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사람들은 대개 '중독에서 벗어난다'고 하면 일직선의 화살표를 생각한다고 한다.
일단 중독에서 벗어나겠다고 마음 먹으면, 매일매일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실상은 복잡한 나선형의 화살표라고 한다.
나아지다가도 나빠지고, 다시 나아지고, 다시 나빠지고. 이것을 계속 반복하다가 결국은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어제 겨우 나아졌는데 오늘 다시 나빠질 수도 있다.
이때 내가 중독 극복에 "실패"했다 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실패가 아니라 그저 "실수"한 것이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면 다시 원점이지만, 실수했다고 생각하면 아직 그래프를 그리는 중이니 얼마든지 목적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어쩌면 회피에 중독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힘들겠지만,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아니, 싹 고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나아지고 싶다.
매일 일기를 쓰지 못할 수도, 만족할 만한 퀄리티의 글을 쓰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돌아와서 계속 글을 남길 것이다.
매일 나아지는 하루를 살아서, 문득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을 만한 삶을 꾸리고 싶다.
앞으로 꾸준히 하루를 마주할 나에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