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두 번의 마무리를 했습니다.
카우앤독 3층 부엌에 샌드위치를 베어물며 멍 때리는데 모리와 쿠마가 편의점 도시락을 사들고 들어왔다. 뜬금없이 던지는 질문을 잘 거둬주는 모리에게 "좋은 마무리란 무엇일까요? 마무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이야기를 꺼냈고 곁에 있던 쿠마가 유명한 게임 업계 일화를 들려주었다.
<파이널 판타지>가 인기가 좋은 게임 시리즈인데 <파이널 판타지 14>는 망작이라 유저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시다 나오키 PD가 투입되어 보니 문제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결국 게임을 리부트하는게 좋겠다고 판단했단다. 그는 유저들에게 게임 공간은 추억이 있는 곳이라 함부로 끝낼 수 없으니 게임 내 멸망을 조금씩 예고하는 시나리오를 만든다. 서비스 종료일이 다가올수록 달의 위성이 커지고 마을에 몬스터가 습격하는 등, 세계의 멸망이 눈에 보였다. 고레벨 유저가 그렇지 않은 유저들에게 좋은 아이템들을 나눠주고 이미 게임을 떠났던 유저들이 다시 돌아오며 함께 세계를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서비스 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어김없이 세계는 멸망했고, 곧이어 나온 영상에 "But every end marks a new beginning"이라는 문장과 함께 <파이널 판타지 14>의 리부트 예고가 나왔다. 다시 출시한 게임은 멸망한 세계를 복원하는 것부터 서사가 시작되었고.
마무리는 결정을 기점으로 시간이 흐르며 저절로 되는 것인줄 알았는데, 어떤 마무리를 하고 싶은지는 그 서사를 꾸리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마무리는 '되어지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었다.
1월에 두 번의 마무리를 한 나는 이 이야기를 먼저 만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꺼이 에너지를 들여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위즈돔은 나의 첫 직장이자 2014년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2년 3개월동안 일한 공간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경험들을 하며 꾸준히 좋은 영향을 받았다.
2017년 12월, 위즈돔은 약 6년 동안 운영하던 서비스를 종료했다. 내가 모리에게 마무리에 대한 질문을 꺼낸 건 위즈돔 서비스 종료 메일이 나간 다음 날이었다. 메일을 나가고 몇 명의 대학 친구들과 유저에게 연락을 받았다.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그들에게 이상하게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근사한 순간들이 많았는지, 내가 거기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배웠는지,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게 그렇게 자랑하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서는 내가 했던 프로젝트를 찾아보기도 했다.
쿠마의 이야기를 들은 점심 시간 직후엔 윤중님과 약속이 있었다. 잠깐이지만 위즈돔의 창업 초기를 함께 한 윤중님에게 내가 들었던 생각, 쿠마가 해준 이야기,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마무리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쭉 뱉다가 서비스 종료 1~2주일 전 쯤, 2015년부터 위즈돔과 함께 하고 있는 쭈가 마련하고 싶다던 자리가 떠올랐다. 쭈는 위즈돔을 함께 만들어온 동료들을 모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그 자리가 만들어지는데 에너지를 쓰고 보태자고 윤중님과 다짐하고 그 날 오후, 쭈를 만났다.
2018년이 초, 쭈와 폴을 만났을 때 이미 각자 머릿 속에 꽤 구체적인 그림이 있었다. 2012년부터 위즈돔과 함께 한 폴은 신사, 불광, 홍대, 성수까지 네 번의 사무 공간 이사에 맞춰 그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이 묶여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자리엔 함께 찍은 사진을 선물로 있고, 기억에 남을 법한 키워드도 두고, 그 시절 함께 자주 먹던 음식도 올리면 어떠냐는 다정하고 섬세한 쭈의 아이디어가 쌓였다. 위즈돔과 오랜 시간 작업해온 디자이너 결이 기꺼이 초대장을 만들어주었고 쭈가 어렵게 써내린 초대 메일에 40여명의 동료들이 응했다. 고맙게도 대구, 대전, 제주, 부산사람도서관을 운영한 지역 매니저들도 서울로 와주었고 헤이그라운드가 공간을 지원해주었다. 2018년 1월 20일, 우리는 함께 위즈돔을 마무리하기 위해 모였다.
모든 사람들은 경험과 지혜를 가진 사람책이라는 믿음으로 모였던 이들이기에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위즈돔을 켜켜히 경험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1주년 파티, 마이스쿨, 큐레이터, 첫 홍대 사무실, 사람-책 되기 툴킷 워크숍, 그리고 일상적인 사람책 모임 운영과 기획 등등. 연혁과 같은 것들이지만 해낸 사람의 어렴풋한 소회로 듣는 일은 다른 기분을 주었다.
'위즈돔에게, 서로에게, 그 시간에게 고마웠고 다시 돌아보면 아쉬워도 열심히 했다'는 어쩌면 별다를 것 없는 말들을 직접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폴의 건강한 이가 만개한 웃음도, 쭈의 모이스처 함박 웃음을 보는 것도 좋았다. 윤중님은 아쉽게 함께 못했지만 충분히 같은 마음을 공유했다.
여럿이 일궈온 시간을 하나의 점으로 매듭 짓지 않고 각자의 기억과 마음을 두텁게 쌓아둔 채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위즈돔이 믿는 가치가 있기에 그런 시간을 갖는게 더 각별했다. 나에게 위즈돔은 관계의 실험이었고 일 안에서의 성장이었고 삶의 전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르게 기억되거나 해석할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좋을 순간을 함께 보낸 동료들과 같이 위즈돔과 인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들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면 좋겠다.
지난 1월을 기점으로 sopoong를 퇴사했다. 나에게는 두번째 퇴사다. 결정과 마무리 사이에 시간이 꽤 있었고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나 하고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로 했다. 망설임없이 선택한건 사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작업과 Gender lens Investing 프로세스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내 가이드라인은 작은 조직이다보니 생략되는 설명과 체계를 공고히하고 싶어서 한 작업이다. 첫 입사일부터 퇴사를 할 때까지 우리가 어떤 약속과 규칙으로 돌아가는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꼭 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회사에 기댈 수 있는 부분은 얼만큼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정리했다. 혬은 이걸 왜 하냐고 물어본 이가 있었는데, 1년 반 가까이 다니다보니 이제 나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딱 그만큼의 마음으로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동료들이 어림짐작하거나, 찾아보거나, 물어보느라고 마음과 몸의 에너지를 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난 10월 SOCAP에서 Gender lens Investing을 알게된 후로 꼭 우리 일에도 적용하고 싶었다. 11월 말에 TF팀을 꾸린 채 아무것도 못하다가 1월 둘째주가 되어서야 첫 미팅을 했고, 마지막 출근까지 빼곡히 시간을 써서 내용을 채웠다. 대체로 일을 다 좋아하지만 이 일은 남다르게 신나고 즐거웠다. 여성으로서 살아가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상에 낙담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이 작업을 하는 나는 낙관적이었다.
왜 이걸 했냐고 하면 페미니스트인 나도 시스템의 감수성을 바꾸는데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안일했던 나머지 내가 일 안에서 내리는 선택과 결정, 꾸리는 과정이 모두 젠더 평등에 나아가고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미 고착화된 젠더편향적인 시스템을 더 나아지게 바꾸는 데는 게을렀다. 비슷한 잘못을 하지 않으려면 시스템의 감수성을 바꿔야 했고 반성문을 쓰는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했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동료들이 잘 다듬고 편집해 3월 8일 여성의 날에 공개할 예정이다.)
sopoong에서 일하는 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해법'과 '돈을 벌 방법' 사이의 관계성을 찾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썼고,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데 매력을 느꼈다. Gender lens Investing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본을 흐르게 하는 투자자'이자 '창업가를 조력하는 액셀러레이터'는 결정자이자 실행자로서 자본을 어떻게 흐르게 할 것인지,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힘을 써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우쳤다. 역할 안에서 얻어지는 영향력을 좋은 방향으로 많이 쓰지 못해 아쉽다.
카우앤독이라는 비현실적으로 다정하고 안전한 공간을 떠났다는 것이 두렵지만 계속 연결되어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인지 아주 마지막인 것처럼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담당했던 팀과 밀착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고민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아쉽다. 이지앤모어, 펫픽의 소식을 먼저 듣고 응원했던 시간,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 함께 골몰했던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귀한 순간들이었다.
펫픽에게 메일 계정을 선물받기도 했다. 메일을 읽자마자 하하하 웃음이 났고 눈물도 핑 돌았다. 로그인을 해보니 정말 되더라. 냉큼 비밀번호를 바꾸고 잘 간직하기로 했다.
연초부터 두 번의 마무리를 했다. 마무리 되어지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하고 싶었던 마무리가 무엇인지도 고민해보고, 그것을 위해 에너지를 쓰고나니 더 후련하기도 하고 더 애틋해지기도 한다. (물론 더 고단해지기도 했다.)
마무리를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끝이 있는 일이고 그 다음을 함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보니 조급함과 무력함 혹은 나태함이 들기 마련이었고 종종 에너지가 더 많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얻은 건 크다. 거창하게 포장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더 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아주 조금이라도 밀고 나가보았고,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냉소를 밀어냈다. 이 낙관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