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상의 환기를 위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강사님은 기교나 이론 대신 딱 한 마디의 주문만 던졌다고 합니다. "앞에 있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만 그리세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수업에 조금 당혹스러웠다고 합니다. '돈과 시간을 들여 배우러 왔는데, 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은 이내 '그냥 그만둘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다고 하구요. 이왕 시작한 건 끝까지 한다는 생각으로 어쨌든 수업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몇 회차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묘한 감각을 느꼈다고 합니다. 점점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인식을 넘어선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고민, 타인의 시선,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 같은 잡념이 썰물처럼 사라져있었습니다. 오로지 사물과 나만이 존재하는 깨끗한 상태에서 손은 눈이 머무는 곳을 정직하게 따라갔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요즘 세상에서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정말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지만, 사실 수많은 '해석의 레이어(Layer)'를 통해 이해합니다. 가치, 효율, 유행, 혹은 타인의 평판이라는 필터가 나도 몰래 작동하며, 내 앞에 마주한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때로는 외부의 해석에 기대버리기도 합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맞는 거야"라는 말들에 내 시선이 가려지는 줄도 모른 채 말입니다.
카페에 앉아 앞에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사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저 멀리 방한 용품을 입고 뛰고 있는 러너들. 간간히 좌우로 날아가는 새들. 시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겨울 나무들. 바닥에 가득 담긴 돌맹이들. 한참을 멍하니 더 바라봤습니다. 조금씩 나무의 형태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나뭇가지들 하나하나가 하늘 위로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가지들이 제각각의 모습과 방향으로 존재하면서요.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깨끗한 마음으로 온전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정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