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두 개인 솥은 세울 수 없으나 세 개면 세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천하삼분지계..."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크게 느껴지는 것이 유럽의 빈자리다.
유럽은 현대 문명의 요람이다. 세계대전 이후 패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정치, 경제, 과학기술, 이념과 철학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최초의 텔레비전 중계, 비틀즈의 데뷔, 냉전의 종결, 제3의 길, 블루투스 발명, 해리포터 시리즈의 무대였던 유럽은 국제질서를 가늠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조연이었다. 한때 유럽 전체의 경제규모가 미국보다 크고, 유럽식 복지국가가 대안 체제로 주목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유럽은 주요 조연이라고 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그 위상이 추락했다.
2008년 금융위기, 스마트폰 혁명, 코로나, 그리고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20년 가까이 유럽은 글로벌 어젠다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럽이 주도하고 있는 이슈는 ‘친환경’ 정도인데 최근엔 좌우 갈등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비슷했던 경제규모는 6~7할 수준으로 떨어졌고, 미래 산업을 선도하거나 소프트 파워에서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정체된 유럽,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걸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세계는‘강하고 역동적인 유럽’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중국은 국가보단 하나의 대륙에 가깝다. 많은 것을 자급자족 가능하며 자기만의 뚜렷한 세계관이 존재한다. 둘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점 투성이지만, 의도했건 아니건 수평적 공생보다 수직적 위계질서에 익숙하다는 점은 완벽하게 일치한다.
반면 유럽은 다르다. 유럽이 자국 시장을 무기로 자기 뜻을 관철시키거나 각자도생을 꾀하며 국제기구의 무력화를 시도하진 않는다. 유럽은 인류가 어렵게 합의에 도달한 ‘하나의 세계’라는 이데올로기를 선호하고 또 지지한다. 이는 유럽이 특별히 윤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적 판단이다.
삼분 구조는 안정적이다.
하나가 극단적으로 굴면 남은 둘이 손을 잡고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싸움과 휴전 외엔 선택지가 없는 양자 구조는 한번 과열된 경쟁을 식힐 방법이 없다. 미소 냉전이 데탕트로 접어든 것도 제3세계의 부상과 중국의 공산권 이탈로 삼분 구조가 고착화된 이후였다.
유럽은 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까?
경직된 사회구조, 절박함이 부족한 문화, 스케일의 한계, 고령화와 이민 갈등에 취약한 유럽 사민주의의 한계 등이 꼽힌다. 하지만 이 정도 문제는 다른 나라들도 겪고 있다. 훨씬 더 취약한 상태에 있는 나라도 많다. 미국의 리소스와 중국의 역동성에 밀리고 있지만, 여전히 유럽은 선진국 클럽이며 다양한 핵심 기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보는 유럽에게 부족한 것은 ‘원칙’이다.
20세기가 끝난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유럽은 새 시대에 맞는 원칙을 세우지 못한 것 같다.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신흥세계를 각각 어떻게 대할 것인가? 유럽인들에게 나토와 유럽연합은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미국과 갈등이 생기면 양보할 이슈는 무엇이며 맞서야 할 이슈는 무엇인가? 유럽연합 전체와 가입국 간 입장이 충돌하면 어떤 원칙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할 것인가? 뚜렷한 원칙의 부재 속에 유럽은 많은 동력을 낭비했고, 미국과 레드팀 양측 모두에게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다.
“형주, 익주를 타 넘어 차지해 그 험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여러 융족과 화친하고, 밖으로는 손권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안으로 힘을 쌓다가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 명의 대장에게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선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으로 출병한다면 패업은 이뤄지고 한실이 다시 흥할 것입니다”
제갈량이 올린 천하삼분지계의 요지다. 순간순간의 임기응변이 아니라 한 나라의 ‘원칙’을 세운 게 제갈량의 진짜 대단한 점이다. 누구와 힘을 합해야 하며, 언제 싸워야 하고, 어느 곳을 사수하고 어느 곳을 노려야 하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미국식 고용제도, 금융제도를 무리해서 그래도 들여오려고 했다간 오히려 탈이 날 수도 있다. 유럽은 미국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테크닉이 아니라 본질을 봐야 한다. 지금 유럽에게 필요한 건 자기만의 대전략이다.
이는 유럽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철저히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아쉽지만 우리가 천하삼분의 한 축이 되긴 어렵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강소국이 될 순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이 시대 우리에게 더 절실한 건 삼국지보단 합종연횡의 이야기를 담은 전국시대 열국지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