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세기는 미국의 세기였다. 하지만 팍스 아메리카가 경쟁자 없이 순탄하게 이어져 온 건 아니다.
○ 추축국
19세기에 걸쳐 서유럽이 구축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걸 목표로 형성된 팽창주의적 연합. 미국과는 뿌리부터 달랐던 만큼 애초부터 공존이 불가능한 관계였지만, 대공황의 여파도 있었던 터라 일본이 자충수(진주만)를 두기 전까지는 중립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미국의 참전은 필연적이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에 자유롭게 접근 가능하다는 것은 미국의 국가 전략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전쟁의 범위가 유럽을 벗어난 그 순간 이미 참전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결과는?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대전 치곤 시시했다. 미국은 추축국 3국을 합한 것보다 더 큰 경제 대국이었다. 석유 등 핵심 자원이 부족해 허덕이는 추축국과 달리 대부분의 자원을 자급 가능한 것도 컸다. 끔찍한 학살과 광적인 인종차별주의만 남긴 전체주의와 미국의 자유주의 중 세계가 미래의 시대 기조로 어느 쪽을 응원했는지는 뻔하다.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 소련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계는 곧바로 차가운 전쟁, 냉전으로 접어들었다.
소련은 19세기 영국, 20세기 미국과 더불어 진정한 의미의 초강대국으로 꼽히는 세 나라 중 하나다. 세계 최대의 군대와 막대한 핵전력의 소련은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게 불가능한 나라’였다. 강력한 계획 경제 정책의 성공으로, 비록 지속 불가능하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지만, 소련은 세계에서 2번째로 큰 경제대국이자 미국도 우습게 보지 못하는 중공업, 과학기술 강국으로 거듭났다.
미국과 그 우방들은 소련 진영과 경제적 관계를 단절하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추축국과 달리 소련은 자원이 풍부했다. 소련 스스로의 경제를 굴리는 것을 넘어 자기들이 거느린 ‘봉국’들을 먹여 살렸을 정도.
하지만 소련의 진정한 힘은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닌 이념에서 나왔다. 지금이야 시대착오적 이념으로 퇴색해버렸지만, 냉전 초기만 해도 공산주의는 대단히 매력적인 이념이었다. 심지어 미국 본토에서도 동조자들이 나왔을 정도.
이처럼 위세가 대단했던 소련이었던 만큼 그 붕괴에 따른 세계의 충격도 컸다. 드러난 소련의 내면은 철옹성처럼 보였던 겉면과 달리 부조리가 넘쳐났다. 이념의 힘으로 고착화된 관료제의 폐해가 심각했고, 공산진영의 맹주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느라 빠져버린 팽창주의의 늪은 너무나도 깊었다. 한때 사회과학 사상 최고의 쾌거로 꼽혔던 공산주의 혁명은 전제주의가 어떻게 개인의 창의력과 생산성을 말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로 남고 말았다.
○ 독일과 일본, 제국의 귀환
세상엔 영원한 아군도 적도 없다. 전쟁에서 미국에 패했던 두 나라는 냉전 동안 미국의 핵심 우방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고 글로벌 경쟁의 무대가 이념과 국방에서 경제로 바뀌면서 우방 간에도 냉랭함이 돌기 시작했다.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한 두 나라는 점점 미국의 전략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며 지역 강국으로의 도약을 모색했다. EU화의 등장,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일화 들이다.
하지만 자유진영 내의 힘겨루기는 생각보다 시시하게 결말이 났다. 미국은 IT, 금융 등 고수익 미래사업으로 대대적인 구조 전환을 감행함으로써 글로벌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독일과 일본은 최적화를 통한 Fast Follower 전략엔 뛰어났지만 미국처럼 혁신을 밀어 부칠 수 있는 유연함과 결기, 그리고 스케일이 부족했다.
애초에 미국에 국방 의존도가 높은 두 나라가 미국의 패권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21세기라고 해도 국력의 근간은 국방력에서 나온다.
○ 그리고 중국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제조업 국가이며 GDP 규모 기준 압도적 2위다. 기준에 따라서는 중국이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고 보는 것도 가능. 중국의 인구는 미국의 4배에 달하며, 매년 수백만 명의 이공계 졸업자들이 연구소와 기업으로 쏟아져 나온다. 중국의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며 미국과의 격차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강대국의 야망을 드러낸 중국은 돈을 무기로 국제사회에서 외연을 확대해왔다. 개발도상국에 열차와 항구를 지어준 게 전부가 아니다. NBA와 할리우드조차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게 중국 자본의 힘이다. 세계 최대의 교역국으로 부상하면서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은 과거 소련의 그것조차 능가할 만큼 커졌다.
여러모로 중국은 미국이 그동안 마주친 라이벌 중 최강의 상대라고 할만하다.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산력’에서 자길 앞서는 적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규모에서 자길 압도할 수 있는 적을 만나자 미국의 대응도 종종 템포가 꼬이는 느낌이다.
아직 중국에겐 ‘소련’처럼 미국에 군사적으로 위협을 줄 역량이나 자기들의 헤게모니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없다. 여전히 인구 대부분이 저소득층으로 ‘독일과 일본’처럼 질적인 측면에서 미국과 경쟁할 수준에 올라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중국은 개발도상국인 만큼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 21세기는 미국의 세기로 남을 수 있을까?
미국의 패권은 중국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을까? 지난 몇 년 간, 역사는 반전의 연속이란 걸 우리 모두가 뼈저리게 느꼈다. 역사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오만에 비례해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는 걸 알게 됐다.
단,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미국의 진정한 힘은 완벽함이 아닌 유연함(Flexibility)에서 나온다. 추축국부터 오늘날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묘사하는 미국은 분열되고, 타락했으며, 자본주의의 병폐에 사로잡혀 자학적인 행위를 거듭하는 ‘망조가 든 나라’였다.
우리는 종종 미국의 유연함을 연약함(Fragility)로 착각하곤 한다. 미국이 모든 걸 까발려놓고 고치려고 하는 동안 남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을 때까지 문제를 숨기느라 급급했고, 결국 어느 순간 느닷없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