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관심이 있으면 한삼걸을 들어봤을 것이다. 한나라의 창업군주인 유방을 도운 개국공신 중 가장 큰 활약을 한 세 사람을 묶어 부르는 표현이다. 구체적으론 다음과 같다.
○ 장량: 전략의 대가였다. 유방의 중요한 결정엔 장량이 간여하지 않은 게 없었고 그의 이름은 명참모의 대명사가 되었다.
○ 소하: 행정의 달인이었다. 전쟁 내내 살림살이를 책임졌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나라의 법규와 조직을 정비했다. 소규조수, 소하가 만든 제도가 완벽하니 후계자들은 무리해서 고치려 들지 말고 잘 지키는 게 낫다는 말이 남았을 정도다
○ 한신: 천하 명장이었다. 싸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손에 넣었다는 평이 남았을 만큼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만한 거물들을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거느렸던 유방, 운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닌가?
유방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조참, 주발, 번쾌, 하후영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고향 친구들이었다. 이만하면 하늘이 처음부터 유방을 승리자로 점지한 뒤 그의 주변에 그 시대의 어벤져스를 보내준 느낌마저 든다.
…정말 그럴까?
아무리 세상 이치에서 ‘랜덤’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역사가 치장해 준 승자의 아우라를 벗은, 영웅들의 낯선 흑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삼걸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장량은 직접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서툴렀다. 직접 무리를 이끌 때엔 100명 이상으로 키우지 못했고 전쟁도 직접 지휘권을 잡았을 땐 패배한 기록이 더 많다.
소하는 시세에 순응할 줄은 알았지만 시대를 주도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방이 아니었다면 시골 관리로 만족하고 있던 그가 재상이 될 수 있었을까? 유방이 죽고 난 뒤 여후가 권력을 휘두를 때도 사실상 수수방관했다.
한신은 전쟁은 귀신이었지만 정치력은 형편없었다. 만일 유방이 정교하게 컨트롤하지 않았어도 한신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을까? 가는 곳마다 오해를 일으키고 적을 만들었던 그의 스타일로 봤을 때 전투는 이겨도 전쟁은 졌을 가능성이 높다.
패현의 친구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조참은 옥리 출신, 번쾌는 개백정이었고, 하우영은 마부였으며, 주발은 초상집을 돌아다니며 피리를 불면서 생계를 연명했던 사람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교육 따윈 받아본 적이 없으며, 자기 이름이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던 건 유방이 아니었다.
조직의 재능 배치는 레고에 비유할 수 있다. 좋은 조작을 많이 모은다고 무조건 멋진 조립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다양한 재능을 비범하게 결합할 줄 아는 능력이다. 만일 한신에게 재상을 맡기고 장량에게 군을 이끌게 했다면, 음주가무를 즐기고 천박했던 고향 친구들의 내면 속에 숨어있는 각각의 비범함을 집어낼 줄 몰랐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방은 없었을 것이다.
유방은 사람의 재능은 천차만별 다양하다는 걸 알았고, 단점을 피하는 데 급급하면 장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며, 리더는 조립하는 역할에 집중해야지 블록 하나하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전쟁 이후 유방이 부하들과 연회 자리에서 남긴 말이다. 이 말 안에 그가 승리를 거둔 비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장막 안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군량을 준비하여 그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어 사우면 항상 이기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데에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부하들의 재능을 정확히 판단하고 적재적소에서 마음껏 활약할 수 있게 밀어주는 리더, 뭣보다도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할줄 아는 리더.
리더십의 정수가 여기 있다. 운이 좋았던 건 유방 덕분에 빛을 발한 삼걸과 패현의 건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