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 까먹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바꿔야 하는 비밀번호. 오류 제한을 넘겨 잠겨버린 계정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기억력에 좌절해 본 경험이 없는 현대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은 걸까?
하지만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 능력은 동시에 약 4개 정도를 처리하는 것이 한계이며, 그 이상으로 늘어나면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진다고 한다. 요즘 비밀번호는 대문자, 소문자, 숫자, 특수 기호의 조합을 기본으로 요구한다. 발전하는 해킹 기술에 맞춰 보안을 강화하는 건 이해할 만하지만, 이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감안할 때 무리한 요구다.
인간의 인지 능력이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증거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우리가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몇 명이나 될까? 보통은 베드로, 요한, 그리고 배신자 유다 정도가 한계다. 독실한 교인이라면 야고보와 마태 정도를 더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2사도’를 모두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스 신화도 마찬가지다.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즉시 떠오르는 존재는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 아레스 정도다. 영화 ‘어벤져스’에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정도만 또렷하게 남는다.
혹시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했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의 키워드를 떠올렸을 때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네댓 개가 한계라는 점이다(토르가 아니라 헐크를 떠올렸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는 ‘포지셔닝’을 둘러싼 경쟁이 왜 치열한지를 보여준다. 무엇이든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야 사람들의 머릿속에 둥지를 틀 수 있는데, 대개 그 세 자리 중 둘은 각각 ‘최초’와 ‘최고’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남은 한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다섯 번째부터는 어쩔 수 없이 조연이 되고, 여덟 번째쯤 되면 이름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 ‘노바디’가 된다.
그렇다면 ‘노바디’가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남이 서 있는 줄에 따라 서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12사도가 아니라 바울이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바깥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선점함으로써 12사도와 겹치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고, 그 결과 신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최고의 스타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니라 ‘반신반인’ 헤라클레스다.
당신이 원하는 자리에 이미 세 명 이상이 서 있다면, 그들의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하지 말고 당신만의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라. 인간의 관심과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희소한 자원이다. 요즘처럼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