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지역을 덮친 충격파>
역사는 직선으로 변하지 않는다. 역사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기존 질서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하룻밤 사이에 역사의 방향을 틀어버린 사건으로 가득하다. 베를린 장벽과 9.11 테러, 걸프전쟁이 그랬다.
그리고 최근 이란과 긴장이 고조되면서 걸프 지역은 다시 한번 그러한 심리적 전환점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갈등은 걸프 국가들이 그동안 상식처럼 받아들였던 기존 질서를 재검토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걸프전쟁의 기억>
1990년 이전의 쿠웨이트는 걸프 지역에서 여러모로 눈에 띄는 국가였다. 1963년에 의회를 설립해 중동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언론과 시민사회는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누렸다. 쿠웨이트 정부는 석유로 번 돈을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인프라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은 1990년에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군이 침공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군이 개입해 군사적 점령은 반년 만에 종결되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전쟁 그 자체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다. 쿠웨이트는 여전히 부유했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쿠웨이트의 자본은 불안한 국내 투자 대신 해외 자산으로 빠져나갔다. 정치도 훨씬 권위적으로 변해 한때 걸프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개방적인 국가라는 이미지는 유명무실 해졌다.
<미사일은 막았지만>
걸프 국가들은 다시 한 번 전환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반격으로 이란은 이웃국들을 상대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사우디, UAE,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가 이란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동안 이란과 서방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 온 오만도 피해를 입었다. 글로벌 허브 역할을 해온 걸프 지역의 공항과 항만, 에너지 시설이 일시적으로 운영을 중단하면서 전세계 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다.
다행히 대부분의 공격은 방공 시스템에 의해 요격되었다. 그러나 미사일보다 더 큰 문제는 걸프 전역에 번지고 있는 혼란과 불신이다. 두바이와 리야드 같은 도시들은 안전과 번영의 이미지를 쌓아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주민들과 투자자 모두에게 이 지역이 여전히 갈등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계 경제의 중심인 걸프>
세계가 재생에너지로 전환을 서두르고 있고 미국의 셰일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걸프 지역은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걸프 지역은 전 세계 해상 석유 수출의 약 3분의 1을 담당한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요소는 자본이다. 걸프 지역의 국부펀드 기관들은 수조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이 막대한 돈은 전세계 부동산과 인프라, 테크 기업에 투입되어 있다. AI와 친환경 기술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이곳의 투자가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만일 안보 위협 때문에 이 돈이 방위 산업 등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 경우 전세계 경제의 희비가 엇갈릴 수 밖에 없다.
<세상은 변했다>
이번 사태는 걸프 지도자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이곳은 인구 규모 대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군사비 지출을 기록하고 있다. 이란 사태는 걸프 지역의 군비확충 추세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론 기존 안보 동맹의 전면적인 재진단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미국은 걸프 지역의 핵심 안보 보장국이었다. 하지만 인권 문제, 석유 정책, 과격해지는 이스라엘 등 여러 이슈로 상황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글로벌 공급망의 치명적인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냈다. 바로 호르무즈 해협이다.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이 좁은 통로로 전 세계 석유 수송량의 약 20%가 지나간다.
일부 국가들은 이미 대안을 마련하려고 노력 중이다. 사우디는 홍해로 석유를 운송하는 동서 파이프라인을 운영하고 있고 UAE는 푸자이라 항구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나머지 국가들은 여전히 호르무즈 해협과 이란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대체 수송 경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나드는 대규모 파이프라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웃들과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Love & Hate>
걸프 국가들은 언어, 문화, 종교를 공유하지만 이웃나라들이 언제나 그렇듯 항상 좋게만 지내온 것은 아니다. 겉으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묘한 경쟁심이 존재한다. 특히 석유 이후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이 비슷한 산업 전략을 추진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중요한 건 ‘심리’>
걸프 도시의 상징은 초고층 빌딩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들은 중동의 번영과 개방성, 그리고 자신감을 상징해 왔다.
그러나 미사일 경보가 울리고 시민들에게 창문에서 멀리 떨어지라는 지침이 내려지면서 이러한 건축 양식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앞으로 도시 설계에서는 방호 구조나 지하 시설, 비상 대응 시스템 등 안전 요소가 더 강조될 가능성이 있다.
도시의 전경이 바뀌면 사람들의 마음도 자연히 바뀌게 된다. 과연 앞으로도 중동은 그동안 보여준 활력과 개방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결국 경로를 결정하는 건 ‘사람’>
오늘날 걸프 지역은 1990년 쿠웨이트가 직면했던 것과 비슷한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다. 갑작스러운 군사 충돌이 기존의 믿음과 계획을 허물고 있다. 불안정이 길어질수록 이곳 나라들이 전면적인 전략 재설정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파장 앞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당면한 문제를 협력으로 풀어내는 지혜를 보여줄지, 아니면 더 큰 분열과 갈등으로 빠져들어갈지는 이곳의 리더들이 내릴 선택에 달려있다.
그동안 멀리 내다보는 비전으로 시대의 흐름에 대처해온 걸프의 리더들이 순간의 충동에 빠지지 않고 이번에도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길 바란다. 미국과의 관계 설정, 이스라엘 대응, 이란 대처, 경제모델 전환에 이르기까지 뭐하나 간단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