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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사이의

거 리

by 우너


' 거 리 를 둔 다 '. 우리는 보통 사회적으로 일정 수준의 거리를 지키는 것 (혹은 지켜주는 것)이 서로의 사적인 영역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것은 명백히 선을 긋는 행다. 모든 것은 행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도와 성향에 달려있다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은 단계에서 일방적으로 내 앞에서 벽이 둘러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그것을 단순히 '예의를 지키는 일'의 일각으로 받아들이기만은 어렵다. 조금 극단적으로는,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꽤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은 이런 얘기가 나왔을 때, 자신이 거리를 두는 것은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그렇게 하는 만큼 동시에 상대방에게도 그만큼의 예의와 존중을 요구하는 메커니즘이라고. 그럼 그건 '내가 다가오는 만큼만 다가오세요' 하는 메시지일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 섭섭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둘이 함께 심은 새싹이 자라 거추장스러워졌다고 해서 한쪽에서 쓰윽 가지치기해 버리는 것은 무례한 일이 아니냐고 어느 날 불쑥 말해버렸다.



하지만 실상 이 나이쯤 우리는, 마냥 사람이 좋아 거리낌 없이 다가가고 계산 없이 정을 주는 속없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사회적 에티켓은 아마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의 처세 일 것이다. 더 조심하고, 신중하고, 시간과 거리를 추로 삼아 저울질하게 되는 것. 해보는 것보다 어림잡아 재고 따져보는 게 더 익숙한 위치. 그래서 그 예의와 정치하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 바리케이드.


그렇지만, 그 거리와 벽을 뛰어 넘는 어떤 강렬한 교감이 우리 사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순간이 올 때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흔히 사회 생활하면서 교감할 수 있는 친구 만들기가 얼마나 녹록치 않은지에 대한 한탄을 많이 듣는데, 그만큼 직장 안팎 구분 없이 너무 잘 꾸며진 태도에 일률적인 매너, 기계적 에티켓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불편하고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예의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예의의 존재가치는 상대방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선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동양의 유교사상과 극진한 예의범절이 숭고하고 거룩한 것으로 우상 받기도 하지만, 과연 현대사회의 우리들에게는 어느 선까지의 겉치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것일까.


나의 소셜 에티켓이 내 옆의 누군가를 외롭게 하고 있지는 않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When someone asked me how to be rude to his mother without getting caught, I replied that the only way to do that is by being extremely polite.

-Diane Cou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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