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 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뼘 가물치를 돌려 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고영민, <반음계>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순간이 불쑥 나를 찾아온다.
어느 틈에 마음 속에 생겨난 커다란 구멍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함께 하던 적막함 속 따스한 일상의 기억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놀이터 그네 위에서 바라보던 높디 높은 하늘과 고개를 살짝 내리면 보이던 할머니댁 발코니. 그리고 그 담벼락 너머엔 영락없이 손짓하는 할머니가 계셨다.
더 깊숙한 저편에는 떠들썩한 기억도 자리한다. 이것저것 키우기를 좋아하던 할머니는 고추며 토마토며 딸기며 집 앞 발코니, 옥상, 통로에 꽉 들어차게 식물들을 키우셨다. 새싹이 얼마나 파릇해지는지, 열매가 얼마나 영글어가는지 하루걸러 이틀 고개를 들이밀던 우리.
고요한 주말 아침 울리던 전화벨 소리. 할머니 분 냄새. 화장하던 할머니 옆에서 자개장을 뒤적이던 나. 낯설지만 좋았던 립스틱을 바른 할머니 모습. 손 꼭 붙잡고 둘이 갔던 교회. 마주치는 할머니 친구분들에게 할머니를 잠시 빼앗기곤 질투심에 심통부리던 엄청난 소유욕의 어린 나.
부모님의 사랑과는 다른 할머니의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깃털처럼 부드럽고 그래서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세상의 모든 가시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던 완충제. 마치 초겨울만 되어도 꺼내주시던 포근한 오리털 이불처럼.
말 한마디면 뭐든지 가능했던 마법같은 사랑 속에서 내가 얼마나 버릇이 없어졌는지 하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햇살같은 웃음. 마음이 녹아내리는 눈빛. 웃음이 부서지는 곳에서 생기던 눈가의 주름까지도. 이제서야 내가 그 웃음을, 화사한 빛을 머금은 내 첫사랑을 얼마나 열렬하게 사모했었는지를 깨닫는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번 돈으로 뭔가를 선물하고 싶었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고, 간직하고 싶은 편지를 쓰고 싶어 몇 번이고 카드를 찢었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손녀가 되는 일은 나이가 들수록 생각처럼 쉽지 않아서, 점점 할머니를 뵙는 일이 어려워졌다.
할머니가 우리의 곁을 홀연히 떠났을 때도 나는 피부로 와 닿는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막연한 먼 나라 이야기처럼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구나. 언젠가 일어날거라 느끼던 일이 너무 일찍 일어나고 말았구나.' 하는 충격.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뒤따르던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불안, 원망과 비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채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엉거주춤 지냈던 날들. 내가 누군지 내가 느끼는 감정들의 정체가 뭔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춘기 어린 나. 생전 처음 겪는 황망함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조차 모른채, 주위 사람들 모두가 깊은 슬픔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 있어 차마 누구가 누구를 위로할 수도, 위로받지도 못한 채 흘려보냈던 몇 년.
생전 처음 가본 장례식장에서 목놓아 울지 않는 사람들이 모조리 너무 미워 도대체 어쩔 줄을 몰랐던 그 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거지, 도대체? 또 어째서 이 세상은 이리도 태연한거지?'
파란만장한 사춘기도 치르고 버겁던 학창시절도 흘려보낸 지금, 나는 할머니를 매일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엔 그 사실이 새삼 당황스러웠고, 조금 지나서는 부끄럽고 미안했다. 가끔 적막이 찾아올 때면 할머니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들었다. 사실 할머니의 빈 자리가 나의 일상에서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지낸 건 기억 저 편에서도 맨 앞쯤 보일까 말까 할 너무 오래 전 일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첫 사랑이자 내 조건없는 첫 팬이었던 소중한 한 사람을 제대로 떠나보낸 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할머니가 주고 가신 사랑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어둑한 방 안에서 할머니의 향수를 느끼게 되었다. 꼭 그렇게 어둡고 꼭 그렇게 적적하고 조용했던 날들. 낮도 밤도 아니던 언젠가, 방 안에 누워 할머니와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게 있었다면 그때의 나는 새하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숨기는 것 없이 아픈 곳 없이. 그리고 그 침묵과 적막함이 전혀 슬프거나 아프거나 허무하지 않았다는 것.
조금 무뎌진 이젠 할머니를 생각하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이 슬프다. 할머니를, 내 곁에 있던 친구가 아니라 세상을 등진 누군가로 먼저 기억하게 된다는 것. 할머니의 향기. 푸근한 엄마 냄새, 비누냄새, 세제 냄새가 뒤섞인 달콤하고 편안한 향기. 주름진 손마디의 촉감이나 걸음걸이, 정겨운 웃음소리, 달콤한 할머니표 식혜와 엿. 그렇게 온 몸으로, 오감으로 와닿던 기억은 나날이 희미해져 가고, 웃고있는 어딘가 희뿌연 모습이 그 달콤한 사랑의 시간들을 대체해간다.
정말 잊는 것도 사랑일까.
사실 아직도 나는 덜 컸는데. 비누 냄새 폴폴 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조금 더 붙잡고 있고 싶은데. 투정이라도 부려보면 마음이 좀 달래질까.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 I do not sleep.
I am the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i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 rain.
As you awake with morning's hush
I am the swift-up-fling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ing fl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 I did not die.
Mary Frye,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할머니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한다던 거짓말쟁이 우리 할머니는, 아마 내가 울면 뚝 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었을 테니까. 울지말라고, 울면 밉다고, 뚝 그치면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그랬을거니까. 그럼 안 우는거니까. 보고싶어서 우는 건 바보같은 짓이니까 나는 안 울지. 나중에 만나면 땡깡부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