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약속을 하고 며칠을 기다려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집 앞 동네를 지날때 문득 생각나 '야 나와' 하면 두말없이 '어디' 라고 해주는 사람, 그런 인연.
두 배의 반가움, 열 배의 편안함.
우리가 좋아.
고맙다.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눈에는 하얀 구름을 붙이자.
서서히 모든 어둠이 낮이 될 수 있어.
반짝이는 구름이 초승달을 만나는 정류장은 갓난아기와 노인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시들함과 보들보들함이 만나 상쾌해지는 물감같은.
구름을 노란 손으로 꽉 쥐면 달이 된다는 믿음으로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코에는 점점 살이 찌는 낙엽을 달자.
살아나는 향기를 맡으며 사라져가는 쓸쓸한 냄새를 잊자.
종이꽃이 통통한 줄기와 닿는 오후는 백지 스케치북 한 페이지가 전시회장에 걸리는 황홀함이니까
무제 같은 제목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재회의 약속 같은 계절에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입에는 혀 가까이까지 낭만을 걸자.
낭만,낭만. 부르기만 해도 불러지는 투명의 사건처럼.
침샘이 말라도 낭만의 노래가 도착할 때까지.
잎이 자라는 것은 물만의 일이 아니니까.
입 속에서 하루 만에 크는 새싹을 본 날이 있으니까.
몇 번 접은 혀가 언젠가는 긴 이야기가 되듯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나는 너의 낭만을 맡았을 뿐인데
모든 머리들이 죽었다.
머리들에 있던 현실이 튀어나왔다.
우리 들의 머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말자.
어떤 환상에도 욕망에도 돌아오지 말자.
낭만 없는 낭만에서도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 이제야, 낭만의 역할
"너를 아껴."
"너를 아껴 내가" 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정작 장식장 속의 곱디고운 인형은 싫다고.
그러니 나를 아끼지 말아달라고. 맘껏 보고 만나고 얘기하고 나누고 부딪혀보자고.
우리가 닳고 닳아서 멋진 빈티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깨달으려면 아파야 하는데, 그게 남이든 자기 자신이든 아프려면 바라봐야 하고, 느껴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삶은 연민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민은 이해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는 관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관심이다.
정말 모른다고 말한 그는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안아주고,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언제나 나를 걱정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왜 그렇게 변해가는지 그는 모르겠다 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모른다는 말은 어쩌면 면죄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의의 반대말 이기도 하고 연민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이해의 반대말이기도 하며
인간들이 서로 가져야 할 진정한 연대의식의 반대말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