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않아도 좋아요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이다."
- Julian Barnes,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에게 상처받는 일에 익숙해진다.
어릴 적엔 모든 결과를 짐짓 나쁜 쪽으로 성급하게 단정해서 상상해버리곤 했었다. 내 마음을 위안할 요량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덮어놓고 가정해놓고서도 혹시 모를거야 하는 기대를 놓지 못하고 안절부절했었다. 결국 모두의 사랑은 이루어져야 마땅하고 모두의 행복은 축복받아야 마땅하다는 기승전결로 급하게 마무리 지어지는 발랄한 만화영화식 해피엔딩에 길들여져 있었으니까.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답 같은 것은 없다. 지침도 없다. 내가 이리저리 애쓰며 생각과 생각을 맞추고 마음과 마음을 포개보려 애를 써도 안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되고 만다. 처음엔 그럴 때마다, 행복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결말을 내가 망쳐버린 것 같아 매번 크게 상심하곤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엔 익숙해지기 마련인지라,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얍삽하게도) 덤덤해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그럭저럭 흘러가겠지- 하고 생각해버리니 나 살기가 수월했다. 아닐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귀찮고 번거로워서, 덜 상처받고 싶어서. 궁금하고 초조해하는 대신 내가 편리한 쪽으로 선택해 짐짓 결과마저 예단해버리는 것이다.
굳이 상처받지 않기로 마음 먹는 것.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응하는 일종의 방어자세일지 모른다. 나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어렵고 두려울 때면 지레 겁을 먹고 내 속으로 파고 들어가려들곤 했으니까. 달팽이가 자신의 연약한 맨 몸을 보호하기 위해 딱딱한 등껍질 속으로 숨어드는 것 마냥. 그렇게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를 스쳐가는 것들을 데면데면 지나쳐 보내는 사이 언젠가는 ‘아 그 때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정도의 두루뭉실한 기억으로만 뭉뚱그려지게 되기를 바라며.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바탕에 두고 대하기.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그 누군가 와서 내 방문을 마구 열어 찬바람을 쌩쌩 불어넣는다면 그것 또한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내가 가진 철학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게 산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위로를 삼으며 나를 토닥인다. '아 내가 이렇게 자랐구나. 그래 많이 큰 거야.' 이런 씁쓸한 합리화의 끝자락에는 외로움이 티나게 묻어나곤 하지만 이게 다 사는 일이다, 오늘을 품에 안고 내일을 그려내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될 말만 주고받을 줄 알면서도 계속한다.
고쳐지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지적한다.
한 번 상처를 받으면, 두 번째에도 상처받는다.
애써 그 상처에 무뎌졌다고 자위할 뿐, 우리는 모두가 상처를 받는다.
나이가 들어, 인생에 더는 놀랄 일이 없다고 말하는 이를 경계하라.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는 이의 삶은 그래서 이리도 초라한지도 모른다.
- Julian Barnes,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