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6화

by 김명현

자유를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행복의 모습 중 하나였다.

시현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현재 시각 새벽 세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산행을 하는 중이었다. 신체를 단련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더 적절한 이유였다. 삶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반쯤 날듯이 뛰며 산길을 올라갈 뿐.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뎠다간 크게 다칠 수 있었지만 그런 우려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현의 몸놀림은 빠르고 강함으로 가득 차 차 있었다.

'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해도 고작 열 네살 짜리가 당주라고? 다른 문파를 우습게 보는 건가?'

'경거망동을 삼가시오. 그 역시 이제 우리와 같은 당주요.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

'실력이 전부요. 그의 강함은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문파는 이견이 없소.'

'그가 성장하면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저는 기대가 될 뿐입니다.'

산길 10km를 오르는 데 삼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시현은 고개를 들어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직 젖빛 안개가 흘러가기엔 이른 시간. 이미 사라져 버린 생명의 빛들이 어둠 사이로 세상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주로서 첫 회담에 나섰던 열 네살. 띄엄띄엄 밝혀진 촛불이 희미하게 어둠을 좀먹고 있을 뿐, 암흑과 별반 다를 것 없었던 회의실이었다. 어둠의 세력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폭력 집단. 무협지에 나올 법한 무술의 문파들이지만 차이점이 있었다. 이들에겐 무협지에 나오는 권선징악이나 정의감 따윈 존재치 않았다는 것, 더 강한 폭력과 막강한 권력. 끝이 보이지 않는 부를 차지하고자 하는 게 존재 이유였다.

산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히 흐르던 적막이 흐트러지면서 몇몇 새벽 산행에 오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현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은 상태였다. 하늘을 보고 대강의 시간을 파악한 후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한다.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고민하는 건 시현과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야생 짐승으로 착각할 만큼 한없이 가볍고 빠르게 달릴 뿐.

평소와 같은 시간에 새벽 작업을 시작했고 아침 일곱시에 문을 열었다. 방학을 곧 앞둔 시점이라 초여름의 바람이 산뜻한 공기를 실어 보낸다. 건너편 반찬 가게에서 아침 도시락 배달 시간이 끝났을 때, 시영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큼직한 투명 플라스틱 상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안은 호두로 꽉 차 있었다.

"천안 호두야. 아주 고소하고 맛있어. 친구가 보낸 건데 시현 씨 생각이 나서."

"감사합니다."

무게로 보아 오만원 이상은 될 법한 양이었다. 시영 아주머니는 시현이 호두를 받아들자 기특하다는 듯 웃음지었다. 시현이 빵을 싸주려 했지만 "넣어 둬. 넣어 둬."하며 거절하는 손짓엔 흐뭇함이 묻어난다. 상황 파악이 빠른 시현은 빵은 넣어 두고 킬리만자로 원두를 갈아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시영 아주머니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시우한테 들었어. 아름드리 사장님한테 쌀과 물을 갔다 줬다면서."

"보잘 것 없는 건데요. 뭘."

"시현 씨는 참 신비한 사람이야. 차가우면서도 상냥하고. 어린 나이가 아니지만 순수하지. 그러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듣죠. 호두 값은 시우에게 빵으로 대신 주겠습니다."

"게다가..정말이지, 고집불통이라니까."

시영 아주머니는 크레마가 두껍게 얹어진 아메리카노를 받아들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 자리에서 호두를 하나 먹어보는 시현. 고소한 내음 가득한 호두를 우물거리자 기분까지 좋아진다. 새벽 산행에서 희미하게 느꼈던 옛 생각이 싹 가실만큼.

아침 손님들이 오는 와중 한 아가씨의 얼굴에 시현의 예민한 촉이 반응했다. 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 아가씨였는데 심심치 않게 고민에 빠져 있는 게 보였다. 일이 힘든 것이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의 내면을 정확히 파악하는 시현은 아가씨의 직장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읽을 수 있었다. 언제나 정확히 시간을 지키고 반듯한 걸음걸이에서 그녀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시현은 바닐라 시럽을 넣은 카페 라테를 건냈다. 야채 식빵 하나를 고른 아가씨는 미간에 인상을 쓰며 퉁명스레 말했다.

"커피 안 사요."

"서비스 입니다."

"쓴 건 싫어한다구요."

"바닐라 라테라 믹스 커피랑 비슷합니다."

"이런다고 빵 많이 살 생각 없어요."

"괜찮습니다."

시현은 무표정엔 어쩐지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비록 작은 테이크 아웃 컵이었지만 서비스라기엔 꽤나 후한 모습. 아가씨는 괜히 신경질을 낸게 부끄러웠는지 어색하게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일순간 보았던 시현의 눈동자는 30대 초반사내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 영혼의 이면까지 들여다 보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아가씨는 잠깐 스마트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늘 여유있게 출근하는 편이라 잠깐 한숨 돌릴 짬은 되었다.

"여기서 마시고 갈게요."

"바깥에 자리가 있으니 앉아서 드세요."

"아뇨..그냥..사장님 일하시는 걸 보고 싶어서요."

시간대에 정해진 일을 마친 시현은 앞치마를 두르고 카운터를 보는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는 동안 시현은 능숙하게 빵을 썰고 포장하며, 거스름돈을 주었다. 단골들이 많아 인사하는 사람도 많았고 여유가 되면 커피를 들려 보내곤 했다. 시현의 얼굴을 무뚝뚝했지만 행동에는 배려심이 가득했다. 좁은 가게 한 구석에 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가씨는 어딘지 부러움이 스민 표정을 짓는다. 오분 정도 그러고 있다가 시현에게 빈 컵을 돌려주었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저도 남의 돈먹기가 아니라 제 사업을 하고 싶네요. 그럼 사람 문제로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을 텐데."

"혼잣말이예요."아가씨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게를 뒤로 했다. 시현은 그 태도에 서린 철없음과 무지를 읽을 수 있었지만 아가씨를 안쓰러워 하는 쪽으로 생각했다. 직장생활의 쓴맛을 보는 사회초년생이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니까. 바쁜 시간이 지난 후,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입맛을 닦은 후 야외 쇼케이스에 음료를 채워넣는 중이었다. 팩 우유와 주스 병을 유통기한에 맞춰 배치하는 와중 인기척을 느낀다. 꽃집 외동딸 연희가 백합과 장미로 꾸민 꽃다발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시현은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은한 향기가 맴도는 꽃다발을 수줍게 건내는 연희.

"쌀하고 물을 주셔서 고마워요. 보답이라 하기엔 좀 그렇지만..가게에 꽂아 놓으시면 어떨까 해서요."

"아버지는 기운을 조금 차리셨나 보구나."

시현은 연희가 준 꽃다발이 사장님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뺨에 옅은 홍조를 띄며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는 모습은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많이 나아졌어요. 두 사람이 간호하니 정말로 힘이 되더라구요. 의사 선생님도 놀라실 만큼..시현 아저씨. 저..유호 선배랑 결혼하기로 했어요."

연희는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도 말했다. 시간이 날때마다 동아리실에서 시타 연습을 하던 유호의 모습에 호감을 가졌다는 것을. 간혹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고, 연인까지는 아니었지만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에 성공한 유호가 관심을 가지고 먼저 연희를 찾았다. 연희의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유호가 청혼을 했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기분이었다고 말하는 연희의 모습은 백합처럼 아름다웠다.

"축하해."

연희에게 완두콩 식빵과 옥수수 식빵. 아이스 카페 라테를 들려 보낸 후 시현은 꽃다발을 물병에 담아 카운터 옆에 놓았다. 백합과 장미는 시현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언젠가 스치듯 말한 것 뿐인데 그 사실을 기억해준 할아버지에게 고마웠다. 연희의 결혼식에 참석할 생각을 하던 와중 웨딩 케이크에 대한 생각이 새싹을 움틔운다. 알아서 준비하겠지, 그렇게 넘기려 했지만 시현은 그답지 않게 고민하는 표정이 지어졌다. 시현은 대부분의 제빵사가 그렇듯 과자와 케이크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너는 제과제빵에 있어서 천재 중의 천재야.'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천재란 뛰어난 자질을 말하는 게 아니야. 성실함과 책임감의 깊이지.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도 깊은 마음을 가진 넌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 할 수 있어.'

'부끄럽습니다.'

'기억해. 너처럼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를 신께서 축복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어. 너의 모든 능력은 헌신을 위한 것이란다.'

독립하기 전 스승과 나누었던 대사가 의식을 물들인다. 전 아직도 스승님의 가르침을 다 받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당장 눈앞의 일을 시작한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오늘의 장사가 끝나고 실온에 둔 버터로 연습용 크림을 만드는 시현. 서랍에서 짤주머니와 갖가지 모양의 깍지를 꺼내는 손길은 무기를 고르는 전사처럼 진지했다. 이후 몇일 간, 시현은 연습용 크림을 나무 도마 위에 짜면서 아름다운 패턴을 다시금 손에 익혔다. 뭐하는 거냐고 묻는 손님들에겐 연희의 결혼식에 케이크를 만들어줄 거라 말하면서.

며칠 후 찾아온 회사원 아가씨는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마치 시현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똑바로 쳐다본다. 시현은 잔잔한 눈빛으로 마이너스 감정으로 구겨진 아가씨를 비추었다. 아가씨는 분노로 가득했지만 시현에게서 느낀 관대한 아우라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든 자존심을 짓밟고 힘겹게 본심을 고백한다.

"..회사에 정말로 싫은 사람이 있어요."입술을 깨물듯한 목소리였다.

"어디에나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있지요."

"저랑 성격이 너무 안 맞아요. 이전에 제가 준 서류를 일부러 훼손한 적도 있고...일이 힘들고 편하고를 떠나 같은 장소에 있다는 자체가 싫어요."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땐 자신을 바꾸는 수밖에 없지요."

"...사실, 그 사람이 파견을 가요. 너무 기쁜데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더 화가 치밀고..이런 제가 부끄럽고..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미워하는 이는 바뀌지 않습니다. 차라리 파견 근무 잘 하고 오라고 선물이라도 줘 보세요. 상대방은 어색해할진 몰라도 자신의 증오를 버리는 것만으로도 심적 부담이 덜할 거예요."

시현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아가씨는 마치 시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이 가게에 찾아온 이유까지도.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속마음을 꺼내는게 어리석다 느끼기도 했지만. 시현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니 그간의 맘고생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기분을 바꿔 웃음을 지으며 시현에게 묻는다.

"빵은..냉장고에서 일주일 정도는 갈까요..?"

"냉동 보관했다가 먹을 때마다 전자렌지에 데우거나 자연해동 하는 게 제일 잘 보관하는 법이죠."

"식빵 종류별로 두개씩 포장해 주세요. 잘라 주시고요."

"안쪽 아름드리 꽃집에도 들러보세요. 소박하면서도 근사한 꽃다발을 만들어 줄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시현은 냉동실에 넣기 좋도록 빵을 균등하게 잘라 깔끔히 포장해 주었다. 아가씨는 소녀같은 웃음을 지으며 빵을 받아든다. 시현은 들어올 때보다 한결 홀가분해진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음지었다. 빵 장사를 하는 사이사이 크림 장식 연습을 하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며칠 후 찾아온 회사원 아가씨는 인사대신 자신의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를 시현에게 보여주었다.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그 동안 냉랭하게 대한게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입니다. 동료로서 잘 지내봐요.'

아가씨의 밝은 얼굴을 보며 시현은 자신이 적당한 조언을 했음을 느꼈다. 시현이 건내는 달콤한 캬라멜 마키아토를 받아들며 아가씨는 식빵 두개를 사 들었다. 어린애라고 할 순 없지만 아직 어른이라기엔 배울게 많은, 이십대 중반의 웃음을 만면에 드리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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