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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개껍데기 SeaShelly Jul 07. 2021

산책 예찬 글

매일 노을을 보기 위해 살아갑니다

매일 노을을 보기 위해 살아갑니다

나에게 순수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들을 찾아서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들에서 벗어나,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주는 것들을 찾아보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름밤의 핑크색 노을이다. 매번 봐도 봐도, 카메라로 담고 또 휴대폰 배경사진으로 해놔도, 내 눈에는 그저 하늘의 그라데이션 풍경을 담는 것만으로도 감탄과 황홀함이 올라온다.

이와 함께 떠오르는 것은 따뜻하면서 동시에 시원한 자연여름바람이다. 야외 피크닉, 테라스, 루프탑을 참 좋아하는데, 기온은 따뜻하지만 미묘하게 세찬 냉기가 있는 야외의 바람이, 피부에 느껴지는 것이 좋다.


이렇다 보니 나는 여름과 그 주변 즈음을 좋아하고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날씨도 야외활동이 어려운 비 오는 날씨, 미세먼지가 많은 날씨, 그리고 극단적으로 너무 내리쬐는 날씨는 극혐이다. 선선하게 좋은 날에 하루 종일 실내에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큼 답답한 일도 없는 것 같다.


대인기피증과 산책 입문기


봄이 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나는 헬스장 유산소 대신 산책과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등산에 제대로 입문한 것은 코로나로 한창 헬스장 문이 닫혔을 때인데, 어쩔 수 없이 산을 타기 시작하고 산을 몇 번씩 혼자 타다 보니 야외를 정처 없이 걷는 것에 대한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졌다.


그러다가 우울함과 무기력, 그리고 대인기피증이 심해지면서 산책에 진심이 되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마 어느 날, 우울함의 감정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무작정 집 밖을 나선 날이었을 것이다. 후줄근한 옷에 마스크를 끼고, 에어팟을 끼고 핸드폰과 지갑만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갔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지만 마스크 덕분에 일그러진 표정은 가려졌다. 그럼에도 마스크가 눈까지 가려주지는 못하니까,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골목길로 향했다. 골목길을 다니다가 도심 속 공원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발견하면 흙길로 발을 옮겨갔다.


봉천동에는 생각보다 공원이 많았다. 고도가 들쑥날쑥한 관악구에는 여러 봉우리와 언덕들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근린공원들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봉천동 공원들은 오르막길이 꽤 많고, 공원을 걷다 보면 미니 등산을 하듯 심박수가 상승하고 땀이 살짝 나서 의도치 않은 유산소 효과를 얻게 된다. 몇 분의 헐떡임은 우울함을 잠재우기에 충분했고, 특히 과식 후 자책하는 사람에게는 소화의 효과와 운동이라는 위안을 주었다. 이렇게 산책을 하다 보니 우울감의 자리에는 새로운 설렘들이 들어섰는데, 바로 탐험가처럼 새로운 곳을 헤매고 발견하는 기쁨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숲 속 탐방을 하기 전에도 맛집 탐방과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큰 길거리에는 보여지길 원하는, 혹은 보여지는 것에 당당한 '꾸며진' 사람들이 많다. 반면 동네 골목과 공원 숲길에는 소박한 주민들, 존재하기 때문에 혹은 존재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특히 봉천동에는 평온한 표정의 중장년층과 노인들이 많다. 사람 만나는 일이 너무 무서웟을 때, 골목길은 시끄러운 바깥세상과 다른 평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어느새 나는 헬스장 대신 골목길과 숲길로 숨어들고 있었다.


2021.05.15 일기
체중에 비례하는 자기혐오
보여지기 싫어서 헬스장 대신 컴컴한 야밤의 산을 선택했다

팟캐스트와 산책 중독


처음에는 산책하면서 한 시간씩 길바닥에 버려지는 시간들이 아까웠다. 예전부터 극악의 멀티태스커였던 나는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강박이 있었고, 영상을 보며 걷는 것은 불가능하니 처음으로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다. 초반에 들은 팟캐스트들은 심지어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경제, 시사 팟캐스트 같은 것들이었다. 들으면 물론 유용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기분이 안 좋은 날 밖에서 뇌에 지식을 집어넣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행복을 위해 심리 관련 팟캐스트로 진영을 옮겼는데, 그 이야기들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관심이 가는 주제들이었으며, 나에게 심적인 위로를 주는 내용들이었다. 특히 최근까지 즐겨들은 팟캐스트는 Beatrice Kamau의 'The Self-love Fix'라는 팟캐스트인데, (이것도 처음에 영어 공부한답시고 일부러 찾아 들은 것이 맞다.) 친근한 호스트 언니가 해주는 캐주얼한 말투의 위로가 여러 번 도움이 되었어서, 일부러 우울한 날 위로받으려고 산책을 나선 적도 정말 많다. 역시나 집에 가만히 앉아서 팟캐스트를 틀기에는 내 성미가 조금 급했다.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며 핑크색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어느 힘들었던 날 또 힐링 팟캐스트를 들으며 산책하다가 의도치 않게 탁 트인 높은 지대로 올라온 나는, 서쪽 방향으로 펼쳐진 아늑한 봉천동 풍경과 노을 지는 하늘을 마주하게 됐다. '호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고, 멈춰 서서 팟캐스트도 일시정지하고 열심히 하늘 사진을 찍어댔다. 딱 알맞은 시간대에 알맞은 곳에 와 있는 기분이 정말 좋았고, 이 희열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학습하게 됐다. 그렇게 노을이 지기  빠르게 집을 나서서, 에어팟을 끼고 팟캐스트를 들어 마음의 힘을 얻으며, 지대가 높은 곳을 향해 산책하는 일은 나에게 가장  힐링이 되었다. 심지어 산책을 안 하는 날에는 유난히 우울해지니, 하루라도 노을 산책을 안 하면 안 되겠다는 강박까지 생겨버렸다.


2021.06.12 일기
매일 하늘을 보기 위해 삽니다, 특히 노을.
기분이 별로 좋지 않게 시작한 하루, 오후에 할리스에 가서 디카페인 아아를 시키고 두 시간 반 정도 빡세게 일을 했다. 팀플을 위한 피피티 틀을 잡고 잡동사니 일들을 끝낼 때쯤에는 창 밖에 해가 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불안한 텐션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후다닥 카페에서 나와 다른 생각은 안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봉천동 놀이터로 가서 노을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봉천역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놀이터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에 뒤를 돌아 예쁘게 지는 노을을 보니 그제서야 탄성과 함께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놀이터로 올라오니 오늘은 어떤 다른 아저씨도 하늘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도 벅찬 마음에 벤치에 앉았다. 아 여기는 와도 와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여기까지 오는 길의 높아지는 고도, 올라왔을 때의 심장 뛰는 시원함과 성취감과 아름다운 노을. 마음이 훨씬 가라앉았다. 모기만 없으면 평생 앉아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꽈배기랑 닭강정을 사러 가야겠다.


어느 날 봉천동 골목을 또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갓 공사를 끝마친듯한  놀이터를 하나 발견했다. 놀고 있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놀이터에 올라오려면 꽤 가파른 경사길 혹은 계단을 타고 올라와야 했고, 이 놀이터가 아래 지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지대에 있는 이 놀이터의 끝 벤치에 앉으면 서쪽의 펼쳐진 동네 풍경과 그 배경에 있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데, 앉아서 평화롭게 노을멍을 때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처음 갔을 때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이 명소가 점점 알려졌는지 갈수록 놀이터 주변 트랙을 파워워킹하는 아주머니, 나처럼 노을멍을 때리는 아저씨들, 간혹 벤치에 앉아 꽁냥 거리는 대학생 커플들이 보였다. 참고로 이 계단 아래에 다른 놀이터가 있는데, 아이들은 다 아랫 놀이터에만 놀아서 윗 놀이터는 어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에게는 경관보다는 접근성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집 근처에 이런 평화로운 곳이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이 놀이터는 어느새 나의 페이보릿 플레이스가 되었다.


봉천동 놀이터와 볼 수 있는 노을풍경

산책에서 느끼는 여러 행복들


산책에는 정말 많은 보물들이 있다. 일단 봉천동 골목길은 귀여운 길고양이들이 정말 많다. 잠깐 다른 얘기지만, 쑥고개로 어느 건물 옆 골목에 벽돌로 만든 작은 상자들에 어미 고양이와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 4마리가 있었다. 진짜 뽀작한 아가들이었는데, 어미가 사람 친화적이라 그런지, 고양이 가족 전체가 경계심이라곤 1도 없었다. 이게 과거형인 이유는, 얼마 전에 산책을 하다가 같은 자리에 고양이 식구가 있는지 확인하러 갔는데, 여성 주민분들 네 분이 모여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다들 서로서로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기웃기웃했는데, 어미 고양이 옆에 아기 고양이가 한 마리밖에 안 보이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야기는 못 전해 들었지만, 느낌상 어떤 나쁜 인간이 나머지 귀염뽀짝이들을 납치해간 것 같았다.(ㅠㅠ) 이날 기분 좋게 산책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급 기분이 안 좋아졌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에 인간의 영악함과 동물의 부모 자식을 떼어놓는 끔찍함에 대한 고찰로 다시 우울해졌다. (집에 가면서 '아기 고양이들이 안쓰럽지만 어쩌면 스트릿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지 뭐' 하며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했다.)

봉천동 고먐미들 (오른쪽 사진이 귀염뽀쨕 아가 고양이)


다시 산책의 행복 이야기로 돌아와, 길고양이 외에도 골목길에는 숨은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다. 뭔가를 딱히 찾으려는 것은 아닌데, 상점들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마주할 수 있다. 가끔씩은 난데없이 경영학스러운 '이 동네에는 이런 장사가 잘되나 보군' '요즘은 배달문화 덕에 공유주방이 참 많군'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나간다. 비슷한 맥락으로, 시장 구경은 언제나 재밌다. 마케팅에 무해한, 물건들의 본질적인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재화를 판매하는 곳이라는 느낌이랄까 (;;) 더불어 멋쟁이 젊은이들이 많은 샤로수길과는 다르게 소박하고 편안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 신분 또한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이 동네 근처 내 최애 시장은 성현동 현대시장이랑 봉천제일시장이다. 각각에 괜찮은 반찬가게도 하나씩 찾아둬서, 산책 겸 4~5일 치 먹을 반찬들도 사 오는 게 소소한 행복이 됐다.


이외에도 예상치 못한 산스장을 발견하는 재미, 나이키런클럽(나의 경우 나이키워크클럽)의 챌린지들을 깨나가는 재미, 숲에서 피톤치드를 느끼는 재미 등등이 있다. 요즘 좀 아쉬운 건 모기가 많아지고 비 오는 날이 많아져서 매일같이 산책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주변 괜찮은 산책로들과 뷰가 예쁜 스팟들을 정리해봐야겠다. 봉천동에 발길 안 닿은 골목이 없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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