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불안, 폭식증, 그리고 극복 이야기 #2
무언가를 향한 끊임없는 불안
나는 꽤나 완벽주의에 사로잡혀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 교수님께서는 나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논문 해석이 어렵고 재미없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은 커서 많이 답답한 상황인 것 같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만 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세상이니, 석사과정을 밟으며 네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고민해보고, 필요하면 경영,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봐라.'
나는 단순히 잘해야 한다는 강박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완벽하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압박까지 갖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나만의 관리자가 있었고, 그 관리자는 나에게 수많은 명령을 가하고 있었다. 압박의 목소리는 엄격한 틀을 만들어놓았고, 그 틀 안에 나를 조립해 넣기 위해 병적으로 걱정을 세뇌시켰다. '오늘은 A를 하고 B를 하고 C를 해야 해, 이동하는 동안 D에 대해 검색하고 E를 예약하고, 며칠 뒤 F가 있으니까 관리를 해야 해서 오늘은 G 운동도 해야 해. 그리고 H를 계속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면 큰일이 날 거야.'
첫 번째 시도, 명상
그해 설 연휴, 내가 겪은 공황에 대해 걱정하시던 엄마는 도움책으로 동네의 명상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해주셨다. 당시의 나는 명상에 관심은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서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껏 경계심을 품은 채 명상 센터에 가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고, 머릿속으로 금색 광원을 상상하며 평화로운 영혼을 위한 안내를 따랐다. 누워서 명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무슨 이유인지 계속 눈물이 났다.
세 차례의 세션 후, 나는 명상에 꽤 매료되어 있었다. '영혼'과 관련된 이론도 물론 흥미롭게 느껴졌지만, 무엇보다 몸을 안정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생긴 것만 같아 안도되었다. 하지만 세 번의 세션은 내가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지는 않았다.
두 번째 시도, 제주도 혼자 여행
언젠가부터 나는 홀로 여행을 즐겼었다. 여행은 현대인에게 결핍되어있던 낙관주의를 심어주어 일종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더불어 혼자 하는 여행은 완전한 자유로부터 자신의 효능감을 느끼게 해 준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내가 가진 자원, 권한, 그리고 영향력 같은 것들을 일깨워준다.
짧았던 8박 9일의 제주도 여행은 아주 유익했다.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며 수많은 고마움을 느꼈고, 낯선 곳들을 돌아다니고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으며 낙관을 되찾았다. 요가 클래스 수강 후 비건 음식도 먹고, 우연히 발견한 책 '소소하게 찬란하게'도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정독했다. 그 책에는 자본주의적인 가치에서 동떨어진 수많은 가치들이 등장했고, 그런 삶을 사는 작가의 시선이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뚜벅이었던 나는 매일 만 보 이상씩 걸으며 제주도를 헤매며 누볐고, 성산에 머무는 동안에는 아침마다 일출을 보러 성산일출봉을 뛰어 올라갔다. 어느 정도의 운동 강박에서 비롯된 행동들이긴 했지만, 그 결과의 산물은 단순한 칼로리 소모 이상의 수많은 경험의 조각들이었다.
제주도에서 나는 휴학을 결심했다. 정확히 어떠한 일련의 경험들과 논리로 이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스스로가 휴식 혹은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망가진 몸을 되돌려 놓고 마음의 정비를 하고 싶었다. 일종의 '멈춤'과 '내려놓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쉬면서 본질의 나를 되찾길 희망했다.
위기, 부모님의 반대
여행 후 나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휴학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다음에 이야기해보자'는 말과 함께 암묵적인 반대가 있었고, 다음 날 아빠가 엄한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걸으셨다.
아빠 - "휴학하고 뭐하게?"
나 - "일단 한 학기 조금 쉬려고요, 쉬면서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고 싶어요."
아빠 - "무언가를 하겠다는 계획 없이 쉬는 것은 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 - "취준 이후 많이 지친 것 같아요... 최근에 제가 힘들어했던 것도 아시잖아요."
아빠 - "내가 보기에 '번아웃'은 핑계다. 너만 힘드냐, 20대가 뭘 쉬느냐, 쉬어야 할 것은 네 엄마 아빠다. 게다가 2월에 충분히 쉬지 않았느냐, 한 달 쉬나 6개월 쉬나 똑같다. 다음 학기 학점을 적게 듣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되지 않느냐."
나 - "온전히 휴학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잘 버텨낼 힘을 재충전하고 싶어요. 대전도 좀 자주 내려가고..."
아빠 - "어휴 생각만 해도 싫다, 너 핑핑 놀면서 대전 내려오는 거. 너 내려오면 내가 스트레스받을 것 같으니 집에 오지 마라. 그리고 '재충전'은 한 달로 충분했다고 본다. 앞으로 졸업하고 회사 다니면서 휴가 쓰고, 이직 준비하면서 잠시 쉬는 것이 쉬는 것이지, 내가 보기에 너는 지금 대학원보다 다이어트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다."
나 - "제가 쉬면서 아무것도 안 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초반에 휴식하다가 해보고 싶었던 인턴도 하며 진로를 찾을 생각이에요."
아빠 - "그러면 그런 인턴 기회가 생겼을 때 휴학을 하지, 왜 무턱대고 벌써부터 쉬려고 하냐."
나 - "대학원이 잘 안 맞는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고민을 하고 싶어요."
아빠 - "대학원이 안 맞으면 당장 때려치우고 취준을 해라. 대학원은 사회에 나갈 준비를 위한 발판이다. 사회에 나가면 더 힘들 텐데 이것도 못 버티면 나중에 뭘 먹고 사려고 그러냐. 그리고 무슨 대학원생이 휴학이냐 학부생도 아니고."
나 - "아빠 그래도 6년간 한 번도 휴학하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아빠 -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만 얘기하자, 끊어라"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무력한 마음에 오랫동안 울었다. 제주도에서 되찾은 활력은 사라지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무능한 나만 남아 있었다. 아주 적은 대학원 월급과 많은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있던 나는 휴학할 능력도 없었지만, 부모님의 뜻을 마음대로 거스를 용기도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빠와의 전화 통화 후 며칠 뒤, 딸의 휴학 결심 때문에 아빠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여기서 나는 내 뜻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문제를 아빠의 불면증으로 치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폭식증
휴학하지 못한 석사과정 두 번째 학기의 시작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고, 혹시 모를 건강 이상을 우려하여 건강검진을 받으러 다녔으며, 대학원 수업을 듣고 운동을 (매우 열심히) 했다.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점점 더 기운이 없어졌고 자신감을 잃어갔다. 몸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이어트는 진작에 그만뒀었고 마음의 불안을 줄이기 위한 명상 세션을 받았는데, 게다가 제주도에서 리프레쉬도 하고 대학원 업무의 부담도 줄였는데 여전히 매일 슬프고 외롭고 힘들었다. '왜 나는 아직도 힘든가'가 마음의 무거운 짐이 되어서 불안을 증폭시켰고, 그 불안은 폭식증으로 이어졌다.
폭식증은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폭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폭식증은 밤에 야식으로 치킨 한 마리를 다 해치우는 것이 아니었다. 폭식증은 점심 샐러드를 시작으로, 집에 있는 냉동 비건빵, 견과류, 단백질 바, 그릭요거트, 그래놀라, 저칼로리 아이스크림, 곤약젤리, 제로 콜라, 단백질 초콜릿을 쉴 새 없이 두 시간 동안 입에 욱여넣는 것이었다. 음식이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에는 정신이 흐릿해져 있고 '이것만 먹으면 돼, 이것만 먹으면 배불러질 거야'하는 간사한 악마의 목소리가 나를 통제한다. 음식이 위에서 식도까지 차오르면 그제야 눈물을 흘리며 자책할 뿐이다.
폭식의 두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허기를 채우고자 노력했고,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으로 (이론적으로) 건강한 다이어트 간식들을 악용했다. 다이어트 간식은 내 소화기관의 허기는 물론, 내 마음의 허기도 채워주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심각하게 결핍되었다는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보충'은 폭식 밖에 없었다. 폭식증은 불안을 씹어먹는 병이었다.
대인기피
몸무게는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었다. 51kg에서 한 달만에 56kg가 된 내 몸은, 폭식에 의해 네 달만에 다이어트 전 몸무게를 뛰어넘은 62kg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지?"
"아마 비겁함이겠죠. 아니면 잘못하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영원한 두려움이거나."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97pg
더 이상 나는 사람을 만날 용기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 성공적인 다이어트로 마른 몸매를 자랑하던 나, 대학원을 다니며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던 다채로운 나는 과거 인스타그램 게시물에서만 존재했다. 현실의 나는 매일 울고, 불안해하고, 무기력한 채 출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스스로가 부끄러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시작은 당시에 내가 다니던 운동 학원이었다. 무거워지는 몸, 울룩불룩한 레깅스, 튀어나온 뱃살을 다들 평가하는 것만 같아 두려워, 예쁘고 마른 여성들이 많은 수업을 일부러 피해 다녔다.
다음은 친구들로부터 오는 연락들이었다. 힘들어하는 사람으로 평가당하는 것도, 무능력한 사람으로 연민을 얻는 것도, 남들과의 비교로 나의 퇴화가 증명되는 것도 싫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해 다녔다.
마지막은 인스타그램이었다. SNS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점점 커져만 가던 간극이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나를 칭명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온라인에 존재하는 기분이었고 그 불편함이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을 더 증폭시켰다.
결국 나는 꼭 필요할 때만 출근을 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냈다. 운동하는 모습도 보이기 싫어서 인근 뒷산을 등산하고, 동네 골목을 산책했다. 망가진 나를 그나마 붙잡아주던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산책과 노을일 것이다. 노을이 좋아 산책을 했고, 산책을 하며 조금이나마 긍정의 에너지를 얻고 왔다.
하지만 폭식증은 계속되었다. 더 이상 나는 정상적인 식사가 불가능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모님께 SOS를 요청해서 병원(정신과 한의원)을 향하게 되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