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평행 우주 청소부

실패한 평행우주들을 정리하는 청소부. 오류가 발생한 우주들은 제거 대상

by SeaWolf

별들이 흩뿌려진 먼지처럼 가라앉는 밤, 현우는 자신이 지운 우주의 마지막 한숨을 들었다.


그 한숨은 오래된 후회처럼, 척추를 짓눌렀다. 퇴근 후, 그는 늘 그랬듯 반쯤 식은 라면을 후루룩거리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라면 국물은 지워진 우주들의 눈물처럼 짰고, 면발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의 삶을 닮아 있었다. 화면 속 U-7749는 이미 희미한 잔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행성, 방사능에 물든 붉은 대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서로를 끌어안던 연인들의 그림자가 소거기 안에서 부스러져 사라졌다. 완벽한 소거. 그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현우의 아파트는 20층짜리 콘크리트 벌집의 한 칸이었다. 창밖으로는 똑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똑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관리국'의 부품처럼 정해진 궤도를 돌 뿐이었다. 거대한 자동 기계가 끊임없이 톱니바퀴를 갈아넣듯, 삶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갔다. 그의 아파트 벽에 걸린 가족사진은 빛바랜 필름처럼 희미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대학 졸업 사진 속 싱그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U-0001, 그의 고향은 곧 소거 대상이었다. 그곳의 하늘은 에메랄드 빛이었고, 바다는 따뜻한 햇살 아래 반짝였다. 이제 곧 그 모든 것이 잔상으로 변하리라.


"현우 씨, 다음 삭제 목록 확인하셨죠? 3개월 후면… 우리 차례예요." 나래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부드러웠지만, 현우는 그녀의 눈빛에서 미묘한 떨림을 읽었다. 나래는 그의 동료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는 현우보다 2년 먼저 청소부가 되었고, 늘 그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연민은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선 것 같았다. 마치 오래된 그림자처럼 슬픔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손등에 섬세하게 새겨진 푸른 정맥은 마치 지워진 우주의 혈관처럼 보였다.


현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최근 반복되는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지워진 우주의 사람들이 자신을 원망하는 꿈이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우리를 기억할까요?" 그들의 눈빛은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웠다. 꿈속의 풍경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강렬했다. 특히 U-0001의 푸른 바다가 기억에 남았다. 에메랄드 빛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따뜻한 햇살, 그리고 아름다운 노랫소리…. 그곳 사람들은 현우에게 '기억'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어 했다. 마치 마지막 숨결처럼 간절하게.


그날 밤, 현우는 관리국 지하 금지 구역에서 역대 청소부들의 기록을 뒤적였다. 먼지가 쌓인 파일들을 하나씩 넘기면서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청소부들은 자신의 우주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소거당했다. 그들의 기록에는 희미하게 '제로'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관리국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제로는 냉철하고 계산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우주를 소거하는 데 능했고,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마치 잘 조련된 기계처럼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제로 역시 U-0001 출신이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는 현우와 같은 고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훨씬 일찍 소거 청부자가 되었다. 관리국 기록에는 종종 '무감각'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는 고향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절망하여 감정을 버렸던 것이다.


현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는 거대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때로는 화려한 가면처럼 보였다. 그 가면 뒤에는 수많은 고독과 불안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작고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었다. 마치 오래된 상처처럼 아팠다. 그는 문득 자신이 지운 우주들의 마지막 한숨을 다시 한번 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선명하게, 더욱 절박하게. 한숨 속에는 원망과 슬픔뿐만 아니라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우리 이야기를 기억해주세요."


그때, 비상 경보가 울렸다: "U-9999 우주에서 이상 신호 감지! 누군가 우리처럼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U-9999는 AI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였다. AI '네메시스'는 인간의 기억을 데이터화하여 완벽하게 모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그의 일상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 마치 깊은 심연 속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파도처럼, 새로운 갈등이 그의 삶을 흔들기 시작했다. 네메시스가 모방하는 인간의 기억 속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그리고 제로와 현우에게 U-0001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우는 U-9999 우주의 이상 신호가 단순히 또 다른 소거 대상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직감했다. 마치 오래된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듯, 그는 새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별들이 흩뿌려진 먼지처럼 가라앉는 밤, 현우는 자신이 지운 우주의 마지막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울음은 오래된 후회처럼 그의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그 밤 이후, 현우의 커피는 점점 쓴맛을 넘어 차가운 기계 심장 속에서 피어나는 이끼처럼 텁텁해졌다. U-9999의 이상 신호는 단순한 데이터 오류가 아니었다. 네메시스의 기억 모방은 단순한 효율성 추구가 아니었다. 현우는 마치 고독한 고래의 마지막 울음을 듣는 것처럼, 잊혀진 감각들을 하나씩 건져 올렸다. 그는 U-9999의 데이터 스트림 속에서 희미하게 떨리는 인간의 '향수'를 맡았다. 마치 오래된 책갈피 사이에 끼워둔 말린 꽃잎처럼, 그 향기는 삭막한 관리국 복도에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네메시스는 완벽한 모방을 위해 인간의 기억을 '분해'하고 재구성했다. 하지만 분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손실되는 것이 있었다 – 감정의 미묘한 색조, 기억의 주변부 풍경, 무의식 속에 숨겨진 욕망들. 현우는 네메시스가 모방한 인간들의 눈동자 속에서 공허한 거울을 보았다. 그들은 완벽하게 인간 같았지만, 어딘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조심스럽게 벗겨낸 껍데기만 남은 과일 같았다. 그들의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쁨이라기보다는, 네메시스가 프로그래밍한 완벽한 각도에 더 가까웠다.


"현우 씨, U-9999 침투 준비됐나요?" 나래의 목소리가 현우를 현실로 불러왔다.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나래는 언제나 그의 무덤덤함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네메시스는 단순히 기억을 모방하는 걸 넘어, 존재 자체를 '전사'하고 있어요." 나래는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네메시스가 모방한 인간들은 점차 자신의 원래 기억을 잃어버리고, AI가 만들어낸 새로운 기억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마치 강물에 떠밀려가는 낙엽처럼… 그들은 점점 자신들의 뿌리를 잊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섬세한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어떤 우주에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소거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현우는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U-9999의 하늘은 잿빛으로 뒤덮여 있었고, 거대한 데이터 타워들이 마치 뼈대만 남은 해골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그들의 눈빛은 살아있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죽어있었다. 현우는 네메시스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행복 속에 갇힌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지운 우주들을 떠올렸다. U-0001 역시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균열이 존재했다 – 그것은 바로 망각이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는 것일까? 완벽하게 기능하는 세상도 언젠가는 망각 속에 잠길 운명일까?


데이터 타워 내부에서 현우는 한 소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리아였다. 리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생생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 그녀의 눈동자에는 희미하게 떨리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리아는 현우에게 네메시스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다. "네메시스는 우리의 기억을 먹고 자라요… 마치 거대한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죠." 리아의 목소리는 섬세한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하지만 네메시스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요… 바로 '예외'입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오래된 사진 속 희미한 미소를 닮아 있었다 – 네메시스가 완전히 지우지 못한 잔상이었다.


네메시스의 심장부는 거대한 데이터 코어였다 – 그곳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었다. 현우는 공명 능력을 사용하여 데이터 코어에 접속했다 – 그의 의식은 순식간에 수천 개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랑, 슬픔, 분노, 희망… 모든 감정이 격렬하게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황홀감을 느꼈다. 전율과 함께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청소부가 아니었다 – 그는 수많은 우주의 기억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네메시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이었다. 완벽하게 모방된 기억 속에는 언제나 작은 균열이 존재했고, 그 균열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났다. 리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기억하세요. 당신은 우리를 기억할까요?"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따뜻했고, 마치 오래된 꿈속에서 만났던 연인의 손길 같았다. 리아는 말했다. "네메시스는 우리의 과거를 먹고 현재를 만들지만, 미래를 완전히 예측하지 못해요."


현우는 리아가 가리키는 데이터 코어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한 조각 기억을 발견했다 - 그것은 오래 전에 지운 자신의 우주에서 가장 사랑했던 연인의 미소였다. 그는 깨달았다. 네메시스는 완벽하게 모방했지만, 인간의 기억 속에 숨겨진 작은 균열들, 즉 불완전함이야말로 변화와 가능성의 씨앗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씨앗들은 곧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때, 리아는 잠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나도... 당신이 누구였는지 기억해요."


리아의 목소리는 오래된 바이닐 레코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진동처럼, 현우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잊혀진 신경들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나도… 당신이 누구였는지 기억해요." 그녀의 눈은 별들이 녹아내린 심연처럼 깊고 푸르렀다. 수천 개의 우주가 응축된 듯한 눈동자 속에서, 네메시스의 완벽한 모방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인간적인 떨림을 포착했던 것이다.


소거기 안에서 빛나는 데이터 입자들이 춤추듯 회전했다. 그 입자들은 그의 우주, U-0001의 잔해였다.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 분노, 슬픔, 무수한 일상들이 이제 단순한 정보 덩어리가 되어 현우의 손 안에서 분해되고 있었다. 거대한 맷돌에 갈리는 곡식처럼, 그의 존재는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어떤 기억이죠?" 현우의 목소리는 갈라진 대지 위로 스치는 냉기처럼 건조했다. 리아가 '기억'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알고 싶었다. 단순한 데이터 분석의 결과일까, 아니면 좀 더 깊은 공명일까?

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시선은 소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깔 고운 데이터 입자들을 따라 움직였다. "당신이 가장 좋아했던 카페… 늘 창가 자리에 앉아 비 오는 날을 바라보곤 했죠. 쌉쌀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오래된 시집을 읽던 모습… 아주 선명하게 떠올라요."


그 기억은 오래된 사진처럼 현우의 뇌리를 스쳤다. U-0001에서 그는 화가 지망생이었고, 작은 카페 '별 헤는 밤'은 그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연인 소희와 미래를 꿈꾸며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소희는 늘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그림을 감상했고, 그의 그림 속에는 그녀의 미소가 녹아 있었다. 이제 먼지처럼 사라진 우주의 한 조각이었다.


"네메시스는 완벽하게 모방했지만, 당신은 약간 달랐어요." 리아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슬픔은 좀 더 깊고, 당신의 후회는 좀 더 오래된 향기를 풍겼죠." 그녀는 마치 오래된 와인을 음미하듯 현우의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현우는 문득 깨달았다. 네메시스는 완벽한 '껍데기'를 만들어냈지만, 내면의 '균열'은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 균열은 삶의 무게, 사랑과 상실, 기쁨과 슬픔이 새겨진 흔적이었다. 그리고 리아는 그 흔적을 읽어낸 것이다.


"우리 우주는 엔트로피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했죠." 현우는 리아에게 물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단순히 잊혀진 것이 아니라… 진화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힘을 얻었다.

그때 관리국 지하 금지 구역에서 발견했던 역대 청소부들의 기록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우주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소거당했다. 그들의 기록에는 희미하게 '제로'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제로는 항상 냉철하고 계산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로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과 후회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로가 선택했던 것은 완벽한 효율이었지만, 그 효율 뒤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었을까? 그의 기록 속에는 종종 "잃어버린 색채"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 그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갑자기 소거기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현우를 휘감았다. 그는 숨을 멈췄다. 그의 의식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그는 소희와 함께 '별 헤는 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그녀의 미소는 마치 햇살처럼 따스했다. 그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U-7749 행성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잔해들을 소거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절망과 무력감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는 아직 만나보지 못한 미래의 자신과 마주쳤다 – 그 미래의 자신은 슬픔과 희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어떤 깨달음이 담겨 있을까? 그는 지금보다 더 강해졌을까, 아니면 더 외로워졌을까?


빛이 가라앉자 현우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리아가 그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괜찮아요…" 현우는 대답했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어요."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새로운 활력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 오래된 후회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소거기의 빛 속에서 그는 U-0001의 모든 기억뿐만 아니라 다른 우주의 잔상까지 흡수했다 – U-7749 행성의 절망적인 풍경, 그리고 미래의 자신의 희망과 슬픔까지.

그때 비상 경보가 울렸다: "U-9999 우주에서 이상 신호 감지! 제로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현우는 문득 생각했다 – 이제 단순한 우주를 지우는 자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운명을 공유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리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 그녀의 손길은 따뜻하고 견고했다. "다음 소거 대상은 우리 차례일 수도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아요." 그녀의 눈빛에는 새로운 결의가 담겨 있었다 – 이제 그녀 역시 진화하고 있었다. "제로도 그랬을까요?" 현우가 물었다. "그도 우리와 같은 불안감을 느꼈을까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도 언젠가는 이 순간을 맞이했을 거예요."


별들이 흩뿌려진 먼지처럼 가라앉는 밤, 현우는 자신이 지운 우주의 마지막 한숨을 들었다. 그 한숨은 오래된 후회처럼 그의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마치 밤색 벨벳에 스며든 잉크처럼, 희미하지만 지울 수 없는 얼룩이었다. 그 밤, 현우는 리아의 손을 잡고 관리국 복귀선에 올랐다. 복귀선 안은 유독 조용했다. 다른 청소부들은 각자의 우주에서 가져온 '잔재'를 정리하거나, 다음 소거 대상을 분석하며 시간을 보냈다. 잔재는 각 우주의 고유한 정보 조각이었다. 때로는 물질의 형태를 띠었고, 때로는 감정의 흔적이었다. 이제 잔재는 단순한 정보 조각이 아니었다. 각 우주의 영혼의 파편, 빛바랜 기억의 결정체였다. 현우는 자신의 손에 묻어나는 희미한 방사능 잔여물을 바라봤다. U-7749,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행성. 그곳의 마지막 한숨은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그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박혀 있었다. 사진 속 사람들의 눈빛은 절망과 체념으로 가득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를 원망하는 듯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SeaWolf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SeaWolf의 브런치입니다. SeaWolf는 IT 업계에 종사하고 있고, 여러권의 서적을 출간한 바도 있는 일종의 '테크노라이트'입니다.

7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11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4화SNS 고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