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픽션 1.
아내와 통화하면서 그가 먼저 전화를 끊은 건 처음이었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그는 이른 새벽 긴급한 회의로 며칠 독일로 출장 간다고 아내에게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아내는 놀란 듯 무슨 일이냐 물었다. 일 때문이니 걱정 말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밤을 새워가며 책장을 비웠다.
12년 동안 야근의 커피 향과 고뇌가 묻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대표이사직 사임서를 메일로 써서 독일 본사의 대주주에게 먼저 보냈다. 그러고 부하 임직원들에게 굿바이 편지를 쓰려고 컴퓨터 메일계정을 열었다. 속정이 깊으면 막상 쓸 글이 없는 게 사람관계일까. 독종에 워커홀릭 별명이 붙은 상사여서 미안했고, 공감력이 부족한 사람을 여기까지 지키고 버텨준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고 썼다. 불길한 현실과 싸우며 미래가 보이는 길을 함께 개척한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메일을 보냈다. 메일 하단에 짤막한 추신을 달았다. 먼저 임직원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겠지만 가정의 경조사만큼은 꼭 알려 달라고 했다. 내일 아침 출근 하면 모두 메일을 열어 볼 것이다. 새벽 세시를 넘겨 사무실 열쇠와 법인차량의 키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출근길에 미리 렌트하여 주차해 놓은 렌터카의 시동을 켰다.
차창을 열고 어둡고 쌉쌀한 초가을 바람을 맞으며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검푸른 하늘아래 하얗게 떨고 있는 백색 가로등 불빛들을 따라 한강변을 달렸다. 사용하던 출퇴근용 백팩 서류가방은 차량 트렁크에 넣었다. 대신 젊은 날 메고 다니던 낡고 푸른 가죽 배낭을 꺼내 메고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회사를 떠나지만 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에 본사가 있는 출장지 도시로 출장 간 추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과 프랑크푸르트 공항 활주로에 비행기가 내렸다. 공항호텔에 체크인한 그는 하릴없이 비행기의 이착륙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이,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거기서 사흘밤을 보냈다. 밴드그룹 스팅(Sting)의 'Shape of my heart' 노래와 스콜피온즈(Scorpions)의 ‘Still Loving You’ 노래를 수백 번쯤 반복해 따라 부르며 750ml 위스키 한 병을 온 더락으로 마셨다.
취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나간 청춘을 다시 불러 내어 현실의 직장과 이별식을 홀로 거행했다. 이별식은 창 밖 활주로에 내린 가을비처럼 차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푸르스름한 새벽 창가에 서서 며칠간 공항의 분주한 활주로를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노래 가사를 읊조리는 그의 목젖은 맑게 떨렸다. 마지막 남은 온 더락을 활짝 들이키고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내 젊은 날들의 이정표여, 프랑크푸르트 공항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