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직함을 달고 시장점유율을 극대화하는 짜릿한 승부가 언젠가부터 즐겁지 않았습니다.
확신과 자신감으로 내가 한 말과 의사결정을 책임지는 독기로 살았습니다. 실익을 따지며 냉정하게 현실을 살아 내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승자독식 패자 퇴출의 줄타기 게임에서 아슬아슬한 일상을 나름 즐겼습니다. 직업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은 S자로 성장하는 매출 곡선이었습니다. 영업이익과 시장점유율이 쭉쭉 올라 글로벌 전략의 챔피언 트로피와 박수갈채를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고락을 함께한 동료들과 샴페인을 터뜨린 날부터 삶이 그다지 기쁘지 않았습니다. 사는 재미가 시들했습니다. 인생의 사명감이 피로감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창밖 바쁘게 점멸하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위스키 온 더락(whisky on the rock)으로 피로를 푸는 시간은 더 이상 위안을 주지 않았습니다.
고독했습니다. 우주 속에 홀로 떨어져 부유하고 있었습니다. 수천만 명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거나, 절대고독을 느꼈습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말한 5단계 욕구 계단의 눈높이가 올라갔기 때문일까요?
정신을 차려 주위를 돌아보니 흥망성쇠의 불안과 어둠이 아프고 지쳐 가는 사람들의 짙은 눈꺼풀에 기생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불안한 내면과 세상의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미술 전시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은 시나브로 나에게 빛을 선사했고 나는 그림에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들의 그림에는 사유가 있되 승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적 경쟁에 지친 내게 그림은 한 줄기 빛의 이야기로 소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찾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처럼 말이지요.
학창 시절 미술 선생님을 따라 그렸던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재발견했습니다. 어릴 적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원양어선을 타고 세상을 떠돌고 싶던 사춘기 소년의 마음이 부활했습니다. 지금의 나와 어릴 적 소년이 함께 미술관에서 만나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잿빛 머금은 시퍼런 아침 바다를 비춘 주황색 태양은 아득하고 아늑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쓱쓱~ 스케치로 그려낸 위에 물감을 찍은 듯한 그림은 잿빛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불안이 투영된 듯합니다. 다만 해돋이는 주어진 오늘을 잘살아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브라보! 상처투성이 과거와 불안한 현재의 내가 그림 속에서 만났습니다. 소년과 어른 둘은 <인상, 해돋이> 그림 속 검은 배를 타고 미래로 가는 노를 힘차게 저어 갑니다. 그림에는 산업사회 바다를 품은 인상과 추상의 에너지가 물결 따라 넘실거렸습니다.
꿈에서 모네는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다른 시대의 그림들을 찾아가 보라고 말입니다. 이후 여러 전시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띈 작품을 보면 궁금한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이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걸까?" "이 작품이 나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라면 이 그림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했을까? "작가는 왜 이렇게 힘겨운 작품에 몰두했을까?" 질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화가의 마음과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미술학원에서 스케치와 수채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수호갤러리 재단의 미술전시해설자 도슨트(Docent) 자격 과정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나 도슨트하고 싶어." 호기심은 열망이 되었습니다.
도슨트(Docent)는 라틴어 '도케레(Docera)'에서 유래했으며 본래의 뜻은 '가르치다'임을 첫 수업 시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5년 정식으로 도슨트라는 자격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지요. 도슨트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 작품을 관람객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전시 해설자를 뜻합니다. 좋은 도슨트가 되려면 관람객이 적극적으로 실감할 수 있도록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고 흥미롭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며 관람객과 공감대를 형성하여 예술 작품과 작가 그리고 전시기획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러(Story Teller)이지요.
문화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해설비평가란 이미 존재하는 것(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 위해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에 빠져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도슨트 자격을 얻기 위한 미술사, 미술비평 그리고 미술시장에 관한 수업 과정은 작품과 작가를 구체적으로 감상하며 알아가는 통증으로 가득 찼습니다. 시대에 따라 진화한 미술 작품과 작가들의 세계를 시각적 그림과 청각적 해설로 배운 과정은 나의 인생 그림 한 점을 새롭게 그려 가는 예술적 행위였습니다.
자격증을 취득하여 봉사자로 첫 임무를 맡은 곳은 분당서울대병원 전시장이었지요. 서울대학교병원과 재단법인 수호갤러리는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환자와 의료진에게 위안을 주고 감성을 나누기 위한 기획 전시를 열었습니다. 도슨트 첫 경험의 현장에서 만난 관람객과의 시간은 소중하고 특별했습니다. 우리들은 관람자들과 현대 추상미술 작가들의 그림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작가의 내면세계와 색 그리고 표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긴장감에 떨리기도 했지만 한 분 한 분과 성심껏 눈을 맞추며 작품으로 안내하는 과정은 숭고한 예술적 경험이었습니다.
해설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해하시던 환자복의 중년 관객과 전시 중인 표현추상화가 신중태 작가의 작품을 몰입해서 바라보던 90대 어르신의 맑은 눈망울이 여전히 아른거립니다. 어린이 환자들과 함께 그림을 보며 나눈 순수한 교감은 도슨트인 우리들이 오히려 위로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약물과 주삿바늘에 지친 관람객분들은 그림과 작가에 관한 질문을 통해 예술이 위안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수술을 마친 청년 환자의 휠체어를 끌고 온 중장년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환자와 공감하며 달라진 나를 발견했습니다. 위안을 주려 시작한 도슨트 활동에서 거꾸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림의 언어적 표현과 사유가 현장에서 작동하는 것을 체험으로 배웠습니다. 나 자신과 세상을 치유해 주는 미술의 힘을 믿고 새로운 길을 오래 걸어갈 결심을 했습니다. 당신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첫사랑에 빠진 나는 다정한 도슨트(Docent)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