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서 일을 시작한지 벌써 여섯달째, 목표로 한 '1년 버티기'에서 절반은 성공했다. 여전히 능력 밖의 과중한 업무에 하루에 10시간은 넘게 공복으로 후달리고도 '나머지 일'이 쌓인 죄인으로 뒷 턴 선생님께 개미소리로 인계를 하지만. "이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야!!"라는 좌절감으로 얼굴을 숙인채 젖은 양말로 퇴근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이제 루틴잡은 나름 손에 익은 것도 같고, 무엇보다 곧 이 곳으로 동기가 배정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야, 나도 이제 병동 동기가 생기는 구나!!
어디서 전해들었는지, 새로 올 신규 간호사의 신상을 줄줄 꿰면서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도 한 때는 저렇게 모두의 입에 올라 조근조근 뒷얘기가 돌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섬뜩했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이곳에 와서 깨달은 사실 하나는, 사람들은 남 얘기 하는걸 너무 너무 좋아한다는 것.
일터에서 만나, 서로의 사생활이나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치기에는 아시다시피 상당히 높은 리스크가 뒤따른다. 사회에서 처음 만난 너와 나의 관계가 그렇게 공고하지 않을 뿐더러, 'A'라고 말한것이 'A가 아니다.혹은 B이다.'로 전달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말많은 동네가 여기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얼른 선생님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욕심에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대며 리액션도 잘해보려 했지만 프리셉터 선생님께서 어떻게 돌지 모르는 말, 덜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 주신 부분도 있고 해서 나름 수다스러운 사람이지만 조용 조용히 지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얘기 떠벌리기는 부담스럽고, 다른 사람 이야기, 특히 그것이 '험담'일수록 재밌어하고, 나누고 싶어하는게 인간의 본능적 특성인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성악설에 과감히 한 표 던진다.).
내가 이 곳에서 일하며 생겨났던 무수한 실수들은 그 중요도에 관계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만 하루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심지어 장기오프였던(오프=휴가) 선생님마저 오랜만에 마주치면 안부를 묻기보다는 "너, 이 일 이렇게 했다며. 그럼 안되는거지!" 라면서 한마디씩 던질때도 더러있었다. 나만 제외한 단체 카톡방이 있는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오늘도 신규답게 일찍 출근해 어제보다 덜 힘들었으면 좋겠단 간절함을 담아 탈의실로 들어가 간호사복으로 갈아 입으려는데, 장을 열자마자 덕지덕지 붙어있는 메모들이 보인다. 내 뒷턴이셨던 선생님이 미처 인계받을때에는 캐치할 수 없었던 나의 미숙한 업무 상황에 대해 열심히 타이핑까지해서 붙여주신 거였다. 캐비넷 바깥도 아니고 안쪽에 붙여주신 것은 나를 위한 배려였을까? 하지만 정작 나는 심술궂게도 마치 엄마가 내 허락없이 방 청소를 하신 것을 알았을때보다 더 별로인 마음이 든다. 잠그지만 않았을 뿐, 캐비넷 안은 개인 공간인데 나 아닌 누군가가 내 허락없이 열어보았다는게 일차적으로 불만스러웠다. 컴퓨터 EMR을 키면 첫 화면에 딱 뜨는 쪽지 기능으로 알려줘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조금 불퉁대며 밖으로 나가, 환자파악을 위해 컴퓨터를 켜서 내 아이디로 접속하자 이미 쪽지함이 반짝반짝거리면서 새로 도착한 내용들이 빼곡했다. 꼼꼼히 읽어보니 캐비넷 안에 있던 내용과 똑같았다. '아, 내가 이런 실수를 했구나. 처리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우셨을까. 진짜 죄송하다.' 싶은 내용도 많았지만, 개중에는 '아, 이건 너도 맨날 하는 실수잖아. 나도 이거때문에 엄청 고생했었다고.'라는 신입치고는 다소 건방진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면 내가 실수한 부분들이 상당수인게 사실이다. 이런 것들을 수용해서 빨리 배워나가는 것이 나에게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일테다. 그래도 맘이 편하진 않다. 오늘도 마스크를 미리 써둔 것이 표정관리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요새 출근하자마자 간호사 스테이션 왼쪽 한켠에 비치된 파란색 덴탈 마스크 한장을 먼저 챙기는게 일상이 되었다.
오늘은 이브닝 근무다.(이브닝 근무시간: 오후3시~오후11시) 데이번 선생님들, 그리고 수선생님과 함께하는 인계시간이 코 앞인데, 출근할때부터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던 수간호사 선생님의 표정이 조금 신경쓰였다. 불안한 마음이 들수록 더 열심히 메모를 하며 내가 오늘 8시간을 꼬박 써 보게 될 환자파악에 최선을 다해보기로 한다.
"너희들, 내가 저번에 환자 혈당체크할때 직접 너네 사번 입력하지말고, 사원증에 바코드로 찍으라고 하지 않았어?"
아, 이거였구나. 우리 병동엔 당뇨 등 다양한 내과적 질환을 가진 부인과 환자들도 많고, 임신성당뇨 산모들도 많기 때문에 은근히 혈당을 측정할 일이 많다.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게 보조원 잡이지만 신기하게 신규간호사는 이미 병동에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한 보조원의 눈치를 봐야하는 일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알아서 적절히 시간을 쪼개 본인이 그 업무를 할 때가 많다. 올드 간호사들과 친한 보조원들은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보조원에게만 혈당 측정 업무를 맡기는 간호사가 있으면 살짝 옆으로 다가가 불퉁대면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였다. 서로 돕는다는 좋은 취지이겠지만 신규간호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도 하나의 '눈치보기'였다.
간호사의 입장에서 혈당측정 기계를 사용할때, 직접 자신의 사번을 손으로 일일이 입력하는 것보다는 바코드로 한 번 찍는게 훨씬 간편하지 않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업무방식이 바뀐지 얼마되지 않았고, 다른 선생님들도 암암리에 5숫자에 불과한 사번을 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은근히 바코드 인식이 잘 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로딩시간이 길어져 오히려 바쁠때에는 애물단지가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 이거 나 벌금매길꺼야. 말을 하면 들어야지. 내가 오늘 근무동안 싹 조사해서 이름 리스트 뽑아서 횟수적었거든? 한 번당 벌금 천원이니까 그렇게 알고 오늘까지 내."
오마이갓. 정규잡으로 가득 찬 데이근무때 이런 걸 정리하실 시간이 있었다니 수간호사 선생님의 업무능률이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사실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그동안 올드 선생님한테 넘어갔다는 것이고 그 말은 다른 팀의 선생님은 또 올드 간호사의 일을 나눠서 했을 것이라는 거기 때문에, 나 역시 오늘은 특별히 인계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받아야 한다. 내가 거르거나 확인하지 못한 앞 선생님의 업무는 뒷턴 간호사가 발견하는 순간 내 업무가 된다. 처음에는 이 부분이 엄격하게 보면 내가 놓친 부분도 아닌데 왜 내가 해야하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뒷턴 간호사는 그 간호사 선생님에게 해달라고 말하는것도 부담스럽고 자기가 하는건 더더욱 싫었고, 나머지 공부라는 의미나 모르는걸 가르쳐 준다는 방향으로 나에게 당연히 맡길 수 있으니까 나더라 하라고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수 있다. 저번에도 앞 턴 선생님께서 간호정보조사지를 작성하시다말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퇴근을 하셔셔, 일하는 도중에 발견하고 이미 입원중인 환자를 스테이션으로 불러 이것 저것 물어보며 칸을 채운 적이 있다. 그러고도 환자가 평소 복용하던 약이 한바가지라면 이걸 또 다 드러그인포나 킴스같은 사이트에서 모양 조회를 해가면서 찾아야 했는데 찾으면서도 내가 자기보다 아랫연차니까 이렇게 일을 미루는구나 싶어서 안그래도 다혈질인 내 가슴속이 시끄럽다. 하지만 아직 능숙하지 않은 신규간호사는 선배들에게 배울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라도 뒤를 봐주면서 나름 플러스마이너스를 상쇄하고 있다고 주문을 외워본다. 중요한건 선배들은 전혀 그 과정을 고마워하지 않고, 나중에 들어보니 오히려 그렇게 해주지 않는 아랫연차들의 뒷담화를 하는 것을 보고 조금 정나미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내가 병동에 있는 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게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이게 진정한 사회생활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속에 참을인을 몇번이고 그려본다. 사실 병원만 이렇지는 않을 터, 어느 직장이든 합리적으로만 굴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 김토다, 니가 제일 많네. 너 벌금 이만칠천원이야."
아니 그래도, 벌금같은 부분은 앞으로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부과하겠다는 등 경고부터 먼저 주는게 맞지 않나? 느닷없이 쌩 돈 27000원을 뱉게 생겼다. 다른 선생님들도 보니 몇천원씩 내야 하는 벌금이 수간호사 선생님의 액셀파일에 쭉 정리되어 있다. 이게 벌금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갈취'였다. 보조원의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환자들의 혈당측정을 해 온 것이다. 절차의 문제일 뿐 결과상 하등 상관이 없음에도 감히 병동 내 수간호사 선생님의 심기를 거슬렸단 이유로 갑자기 돈을 내야하는데 솔직한 마음으로는 반발심도 들었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던가.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다. 까짓꺼, 이거 내고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아깝지만 커피 몇 잔 안마시면 되지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기분은 나쁘다. 금액을 떠나서, 이 곳에서 앞으로도 일하기 위해 어마무시한 힘 앞에 굴복해야 하는 비참한 기분도 든다. 인계가 끝나자마자 우선 중요한 일들부터 처리하려고 했지만 득달같은 성화에 바로 ATM기로 내려가 돈을 뽑고 있는데 나 대신 일하고 있을 전 턴 선생님이 신경쓰이면서도 봉투를 들고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을 수선생님 앞으로 가자니 빚쟁이가 된 듯한 마음이 든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았지만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만칠천원,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는 돈, 차곡차곡 모아서 병동회비로 맛있는거 많이 사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