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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Jun 15. 2021

꼬리야 꼬리야 날 살려라

 

일상은 날마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일상은 꾸준히 가변적이고 때로는 드라마틱합니다. 언제 몰아칠지 모르는 모래바람을 버티려고 우리는 고단한 희망을 붙들고 기도하고 꿈꾸고 노래합니다.    


아등바등 버티든지 성실하게 살든지 앞으로 한발씩 나아가다 보니 벌써 계절은 여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산책로 앞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바람이 지날 때마다 짙은 초록 이파리를 품은 가지를 흔들어 반짝이는 햇볕을 선사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이곳에 있는 나의 삶은 순탄한 듯, 고단함이나 피로감은 별 일 아닌 듯 보입니다. 자연은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입니다. 


6월은 하얀꽃이 많이 핍니다. 불두화 꽃송이가 소담스럽습니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뜨거운 태양이 내려 쪼이는 열기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햇볕을 감당하며 걸음을 재촉해 숲으로 들어갑니다. 산림욕장 여사님들이 보리수나무 아래에 모여 있습니다. 열매가 많아 가지가 휘어진  나무 밑에 바구니를 놓고 붉은 과육을 따고 있습니다. 보리수 청을 담글 거라고 합니다. 몇 주 전에 하얗고 자잘한 꽃이 나무에 가득히 피었을 때엔 달고 향기로운 꽃 냄새를 멀리서도 맡을 수 있었지요. 보리수꽃향기를 맡은 벌들이 몰려와 나무 전체에서 잉잉대며 꿀을 모으는 풍족한 소리가 났던 나무에 파란 작업복 조끼를 입은 여사님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풍성하게 들려옵니다. 


흰꽃을 떨군 보리수는 붉은 열매로 흡족합니다


        

앞서 걷는 홍선생님 분홍색 반팔 어깨위에 숲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조각조각 얹힙니다. 걸을 때마다 반짝이는 비늘들이 파닥입니다. 햇살 물고기가 벚나무 가지를 가리킵니다. 

“까맣게 익었네요. 맛있겠다.”

“이건 산버찌 아니잖아요. 떫을 걸.”

미심쩍어 하면서도 손은 높은 가지를 향해 올라갑니다. 가지를 끌어당기자 이파리 사이로 숨어있던 버찌들이 까만 구슬처럼 영롱합니다. 벌써 입안에선 침이 고이고 빨리 먹고 싶어집니다. 너 한 알, 나 한 알. 두 알씩 따서 나누어 먹어봅니다. 그럼 그렇지. 떫은맛입니다. 한 알 더 먹어봅니다. 작은 열매가 입안에서 시고 떫은 과육을 톡 터뜨린 게 미안했는지 끝으로 달콤함을 조금 나누어 줍니다. 아주 조금의 단맛에도 행복해집니다. 

   

4월 화양연화의 계절에 벛꽃이 만들어내는 둥글고 환한 꽃그늘 아래에서 나도 이렇게 꽃과 같이 빛나기를 모든 이의 환호와 찬탄을 받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꽃잎은 열매를 키우기 위해 자신을 떨굽니다. 매번 꽃 같이 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봄에는 꽃같이, 여름에는 열매같이, 초록이파리 같은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나는 얼마나 익었을지 가늠해봅니다. 나에게도 40퍼센트의 신맛과 그만큼의 떫은맛과 아주 조금의 단맛으로 완성되어 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이 아름답습니다


   

갈참나무 거친 줄기의 무늬가 움직입니다. 수상한 움직임에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 한 무릎을 땅에 대고 봅니다. 뭉툭한 줄장지뱀이 짧은 몸을 비틀어 나무 위로 올라가려다가 낯선 관찰자를 만나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줄장지뱀은 언제 왜 꼬리를 잘랐는지 꼬리자리가 뭉툭합니다. 언제 잃어버렸는지 모를 꼬리는 그 자리에서 펄떡거리며 사나운 포식자를 따돌리고 몸통을 살렸을 겁니다. ‘꼬리야 꼬리야 날 살려라’ 했던 고마운 도마뱀의 일부는 숲 속 어딘가에서 주인을 잃고 땅속으로 스며들었을 거고요. 두고 오지 못한 서리서리 기다란 나의 꼬리는 무엇일까. 욕심과 희망 사이에서 애매해진 나의 꼬리가 거추장스러워집니다. 

    

사방댐 아랫길에 산딸나무 두 그루가 아직도 환하게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산 아래라서 오래도록 하얀 꽃이 아름답습니다. 빨간 보리수 바구니를 들고 웃는 여사님들의 얼굴들도 햇볕에 붉어졌습니다. 열매들은 유리병 속에서 삼투압의 시간을 지나 익어가고, 우리의 일상도 계절이 스며들어 여름다워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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