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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희 Feb 23. 2023

태어난 것만으로 그 할 일을 다했으니 충분하다

8:18am

우리가 믿었던 것들이 모두 아니라고 판정받는 꿈을 꿨다. 소수지만 저항했던 사람들과, 그 주장들이 끝끝내 승리하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라 처참히 져버리는 이야기. 모든 구조적인 문제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판결에 나는 묵묵히 쌓인 짐들을 옮겼다. 우리의 주장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어떤 것들에 저항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아침 요가를 하며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들이 진실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견해나 믿음일 뿐이라는 게 조금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다른 해석을 갖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자유를 주었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또다른 지점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리는 알 수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되뇌었던 문장이 조금은 서글프게 들려온다.


어제 우주와 저녁을 먹었다. 우주는 사회활동가인 친구 보리가 이번에 삭발을 했다며,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도 삭발까지 한 보리를 만나기가 점점 무서워진다는 얘기를 했다. 보리는 모든 이야기를 큰 구조에서 이야기하는 편이라 자신의 이야기도 항상 큰 이야기 속의 일부로만 여겨지는 것 같아 대화가 어렵다는 이야기도 했다. 보리의 세계와 우주의 세계는 다른 것 같아보였다. 경험한 세계와 믿고 싶은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섞여질 수 없는 두 세계가 친구라는 연결고리로 잘 버무려질 수 있을까? 그러면서 우주는 자신의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소박한 행복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커다랗던 행복의 사이즈가 대폭 줄었는데, 꿈과 낭만을 품고 달려가던 조금은 더 젊었던 시절을 뒤로한 채 우리는 현실에 재적응하는 것 같았다. ‘태어난 것만으로 그 할 일을 다 했으니 충분하다’는 신해철의 말처럼 새로운 낭만을 장착한 걸지도 모르겠다. 식당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나에게 이왕 살거면 영원히 살고 싶다며 허무주의자 우주가 대답했다. 참 희한하게 귀여운 친구다. ‘다들 왜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걸까요?’ ‘그게 그냥 사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믿고 있는 게 와장창 무너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 무너진 게 아니라 믿고자 하는 게 달라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꿈의 마지막엔 가정을 이룬 오랜 친구가 나왔다. 저항동지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반겨줄 것만 같은 친구다. 우리는 처참히 패배한 흔적들을 함께 치웠다. 패배한 다음 날에 이렇게 그 친구와 함께 웃으며 정리할 수 있다니. 진 것 같지 않은 기분이다.



2023년 1월 28일 토요일


태어난 것만으로   일을 다했으니 충분하다, 8:1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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