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타 작가가 될 뻔한 적이 있다
제가 제 인생을 주제로 글을 쓰는 이유는 ‘영생’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불과 100년 전,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평범한 사람이 누구였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의 이름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지기도 합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한계는 인생의 유한함이며, 이것이 사람들이 명예와 이름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할머니는 제 글을 통해 영원히 살아 계시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불국토에 계십니다. 할머니 바람대로 극락왕생하셨고, 해탈하셨으며, 열반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완전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도움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돕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는 것이 때론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누군가의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저의 큰 차이점은 희망과 절망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계속 절망을 선택하지만,
저는 절망 속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탐색합니다.
저는 10년 전, 스타 작가가 될 뻔한 적이 있습니다.
카카오와 다음 메인 페이지에 저의 남루한 글이 공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저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럴 만한 정신력이 없었습니다.
글을 다시 쓰며 돌아보니, 10년이라는 시간은 제게 반드시 필요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부러진 뼈가 다시 붙으면 더 단단해지듯, 저는 수많은 경험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치고 깨지며 조금씩 단단해졌습니다. 끊임없이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과 사회를 배웠습니다. 발전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는 분명히 성장해왔고, 그렇게 오늘에 이르러 지금의 제가 완성되었습니다.
저는 여자친구를 만나는 주를 제외하고는 매일 가게 문을 직접 엽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업로드합니다. 제가 다작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식할 필요도 없고,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시선은 오직 ‘나’의 시선뿐입니다.
저는 자존감이 없고, 자존심 또한 없습니다. 만약 자존심이나 자존감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세상 밖으로 꺼내놓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제 이야기들은 수치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자아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없다는 것은 ‘나’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잘 모르실까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은 저의 시선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제 눈은 제 아이폰을 향해 있고, 저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자유롭다면, 누구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작의 두 번째 원천은 메모입니다. 제 서랍 속에는 정리되지 않은 원고들이 무수히 쌓여 있습니다. 새벽에 떠오르는 감각을 가리지 않고 마구 적어 내려갑니다. 맞고 틀림,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으로 스스로를 주저앉히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정교화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브레인스토밍’과도 같은 작업입니다.
질적 우수함은 양적 축적을 기반으로 탄생합니다.
브루스 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 가지 발차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은 두렵다.”
문자는 인류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숏폼과 릴스처럼 도파민을 자극하는 매체에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문자에 대한 해독력은 점점 떨어지고, 깊이 사고하는 능력에서도 멀어지고 있습니다.
글을 읽지 않는 시대에 글을 쓴다는 일은 분명 아이러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글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의 경종이며, 각성을 요구하는 시도입니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받아쓰기를 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민원을 넣는 학부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가 과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무사히 다닐 수 있을까요. 아이는 자기 인생을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문자와 글이 장점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문자는 때로 인간의 사고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문자에 지나치게 의존한 인간은 발표를 할 때 스크립트나 프롬프트에 의존하게 되었고, 글을 쓸 때조차 시도 때도 없이 문헌을 참고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과거에는 검색을 통해 자료와 정보를 모아 문서를 작성해왔고, 지금은 AI의 발달 덕분에 훨씬 더 효율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른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몇 줄조차 온전히 써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 머릿속은 생각보다 많이 비어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특히 미얀마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삼장(Tipitaka, 티피타카)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통째로 외우는 스님들이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팔만대장경을 외우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전인 빨리어 삼장(Pali Canon)을 암기하는 전통입니다.
동남아 불교 전통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 없이 후대에 전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문자가 없던 시절부터 구전으로 법을 전해온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경전을 완벽히 암기하는 행위는 수행의 정점이자 가르침을 수호하는 가장 엄중한 실천으로 여겨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부터 책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사후 약 500년 동안 불경은 오직 제자들의 머릿속과 입술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이 놀라운 전래 과정은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두뇌 역시 늙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몸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혹독한 운동으로 단련된 몸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뇌는 죽을 때까지 쓰면 쓸수록 변합니다. 이를 ‘뇌 가소성’이라고 합니다.
방금 언급한 수천 페이지의 경전을 외우는 스님들의 사례는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뇌 가소성(Neuroplasticity)’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예시 중 하나입니다.
우리 뇌는 쓰면 쓸수록 변합니다. 마치 자주 다니는 길은 넓어지고, 다니지 않는 길은 잡초가 우거지는 것과 같습니다. 특정 정보를 반복해서 학습하면 신경세포, 즉 뉴런 사이의 연결 부위인 시냅스가 굵고 튼튼해집니다. 반대로 사용하지 않는 회로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과감히 정리됩니다.
심지어 뇌에는 재배치 기능도 있습니다. 특정 부위가 손상되면, 다른 부위가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회로를 새로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경전을 암기하는 스님들의 뇌를 연구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기억력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가 일반인보다 눈에 띄게 비대해집니다. 이는 복잡한 지도를 외운 뒤 영국의 택시 운전사들의 해마가 커진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집중력과 인지 제어에 관여하는 뇌 부위의 회백질 밀도 역시 함께 높아집니다. 지속적인 암기 수행은 노년기에도 뇌 세포의 소멸을 늦추고 새로운 신경망 형성을 돕습니다. 80세가 넘은 노인조차도 새로운 언어나 악기를 배울 때 뇌 구조는 변합니다. 나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행동을 반복하면, 뇌의 ‘길’ 자체가 바뀌어 결국 새로운 습관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오랜 시간 쌓여온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졌으니, 이를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평생 한글을 모르고 살아왔던 할머니가 단시간 안에 한글을 배우기 어려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년이 되면 우리 모두 새해 다짐을 합니다. 저는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고, 매일 작성하고 게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해내는 중입니다.
10년 전의 수많은 일들은 운이 작용한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실력이 아닌 요행이었습니다. 요행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세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메인 페이지에 밀어주기에 저의 알맹이는 형편없었고 과분하게 짧은 시간 동안 쉽게 큰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이태리 여행을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태리 여행에 대한 글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잘해야한다는 강박이 과했습니다.
저는 그 경험을 실패라기보다 경고로 기억합니다. 너무 이른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시험이며,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됩니다. 연예인을 비롯해 수많은 유명인들이 그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는 장면을 우리는 반복해서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년 출세를 경계합니다. 늦어도 좋고, 느려도 괜찮습니다. 다만 흔들리지 않고 오래 버티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요행이 아닌 쌓여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박수를 위해서가 아닌 행위 그 자체가 주는 행복함이 느껴집니다.
지금 쓰고 있는 주제가 더 나아가지 않으면 서랍 속 다른 주제를 꺼내봅니다.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만히 내려놓고 눈을 감습니다.
저는 두 번째 카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기에 신속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된다는 보장도 없고 반드시 성공시켜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연이 허락하면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면 온갖 수고를 들인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잘 할 필요가 없습니다.
뭐든지 그냥 하세요.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 장애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것.
우리가 태어난 이유 역시 하나뿐일지도 모릅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박에 깨달음(頓悟)을 얻은 후에도 번뇌와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닦는 수행(漸修)을 이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