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대학교 신화

열등감의 형성과 소멸에 관하여

by 무명

2009년의 신촌은 세련된 도시의 얼굴을 하기 전, 가장 거칠고 밀도 높은 야성을 품고 있었습니다.


연세로와 명물거리의 공기는 늘 무거웠습니다. 대형 프랜차이즈의 매끄러운 유리벽 대신, 세월의 때가 탄 개인 호프집과 밥집들이 서로의 어깨를 밀치듯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겹겹이 포개진 간판들은 밤마다 과잉된 네온사인을 뿜어냈고, 길바닥엔 누군가의 꿈과 욕망이 짓밟힌 전단지들이 눈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새벽이면 식지 않은 아스팔트 위로 맥주와 소주의 시큼한 냄새가 독기처럼 엉겨 붙던 곳, 그곳이 우리가 기억하는 신촌입니다.


연대 정문 앞은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이대와 서강대 학생들까지 썰물처럼 밀려와 주말이면 발 디딜 틈조차 없었죠. 스마트폰이 막 태동하던 시기, 사람들은 여전히 약속 장소에서 '실제로' 서로를 기다렸습니다. 카카오톡의 가벼운 알림음 대신 80자의 무게를 담은 문자 메시지가 오가던 시절, 기다림은 그 자체로 간절함의 증거였습니다.


밤 11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에도 신촌은 잠들지 않았습니다. 전봇대마다 다닥다닥 붙은 인디 밴드의 포스터들, 지하 공연장에서 터져 나오는 둔탁한 드럼 소리, 그리고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로 튀어나온 취객들과 호객꾼들의 고함. 그 혼돈 속에서 신촌은 대학가라기보다, 별개의 중력을 가진 독립된 행성처럼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난장판의 중심에서, 나는 철저히 '경계 밖의 이방인'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이었을 그 풍경이 나에게는 날카로운 가시였습니다. 나는 신촌의 '주인'이 아닌, 원주라는 먼 곳에서 온 '서자'였으니까요. 연세대학교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묶여 있었지만, 재단의 시선도, 세상의 잣대도 나를 '찬밥' 취급하기 일쑤였습니다. 신촌의 독수리가 화려하게 비상할 때, 나는 그 그림자 밑에서 발끝만 바라보아야 했던 열등감의 목격자였습니다.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고, 저를 사로잡은 열등감은 매일, 매주 저를 술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내 모교는 '미래캠퍼스'라는 새 옷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약속하는 미래는 여전히 흐릿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내 모교의 이름 뒤에 차가운 꼬리표를 붙였고, 그 이름은 마치 낙인처럼 오랜 시간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원세대


사람들은 자신을 올려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온갖 무례한 언어로 끌어내립니다. ‘매지대학교’, ‘미래가 없는 캠퍼스’가 바로 그런 류의 품위 없는 단어입니다.


저는 오래도록 사람들이 저에게 쏜 화살을 주워서 제 가슴에 꽂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2013년 부터 2015년까지 3년 동안 신촌을 어슬렁거리며 한참 동안 아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