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화> 도깨비 이모님

by 윤경림


마지막 학원이 끝나니 8시였어. 몸은 천근만근, 머리가 무겁고 잠이 왔어.

“시호 왔니?”

시호는 고개를 끄덕였어.

“태권도장에서 저녁 먹는 거 힘들지? 엄마가 학원 시간 조정할 테니까 내일부턴 집에서 먹고 다시 학원 가.”

왔다갔다하기 싫은데… 시호는 엄마가 주는 물약을 꿀꺽 삼켰어. 그런데 어떻게 저녁을 먹지? 내가 할 줄 아는 건 라면뿐인데. 시호는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때부터 말이 나오지 않았거든. 한 번 말이 사라지니 클리닉을 다녀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어. 약도 먹고 있지만, 돌이 목구멍을 막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엄마는 시호의 표정을 알아보지 못한 채 말했어.

“아, 오늘부턴 이모님이 오시기로 했어. 저녁은 이모님한테 해달라고 하면 돼.”

깜짝 놀란 시호가 엄마아빠를 쳐다봤지만 둘은 일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시호는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 게 싫었어.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자신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싫었고 전처럼 집에서 마음 놓고 쉬지 못할 거라는 것도 싫었어.

“엄마아빠 이번에 둘 다 출장 가잖아. 어떡하나 싶었는데 운 좋게 사람이 구해졌지 뭐야.”

“나이가 좀 있으시대.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말 잘 들어야 해?”

아니, 그게 아니야. 나는 차라리 혼자 있고 싶어요. 혼자 챙겨먹는 게 더 좋아요. 시호는 입을 벌리고 열심히 말하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 말을 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져서, 시호는 힘없이 방으로 들어갔어. 속상해서 울어도 아무도 시호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어.

누구든 좋으니까, 내 마음을 잘 들어줬으면 좋겠어.

시호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생각하며 잠에 들었어.

띵동

퉁퉁 부은 눈이 번쩍 뜨였어.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시호는 학교에 늦은 줄 알고 허둥지둥 일어났어. 한창 출근 준비를 하던 엄마가 눈꼽을 떼어줬어.

“일요일이니까 점심부터 학원 있는 거 알지? 이모님이랑 잘 지내고 있어.”

또 띵동, 소리가 들렸어. 나가요! 넥타이를 매던 아빠가 현관으로 뛰어갔어.

현관문 앞엔 시호와 키가 똑같은 어린이가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어. 엄마 뒤에 숨어있던 시호는 놀랐어.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 같았거든.

“여기가 박하연, 윤세호 씨 집 맞습니까?”

목소리도 초등학생이었는데 거침없이 말하는 건 꽤 어른 같았어.

“어서 오세요. 아침부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주방은 이쪽, 네, 신발은 거기 벗어두시면 돼요.”

“시호야, 인사 해야지.”

엄마아빠는 그 어린이가 어른인 것처럼 존댓말을 했어. 아빠는 “저희 어머니를 참 닮으셨네요” 너스레도 떨었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저 사람은 그냥 어린이잖아! 엄마는 그 어린이에게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줬어. 옷을 다 입은 아빠가 시호 옆구리를 쿡 찔렀어.

“이따 꼭 인사 드려라. 이름은 ‘산채’시래. 특이하지? 이모님이나 산채이모님이라고 부르면 돼.”

어린이는 귓구멍을 한번 파더니 엄마아빠의 등을 떠밀었어.

“알았어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김서방은 얼른 출근이나 해요!”

“아이, 상담할 때도 그러시더니. 저는 김 씨가 아니라-”

“얼른, 얼른!”

엄마아빠는 쫓겨나듯 집을 나갔어. 엄마아빠 입에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토스트를 하나씩 물려준 산채이모는 문을 닫고 돌아왔어. 그리곤 서 있던 시호에게 다가와 질문 공격을 시작했지.

“네가 시호구나? 잘 부탁한다! 아침은 먹었냐? 근데 키가 되게 작구나? 이 앞 초등학교에 다니지? 오늘은 몇 시에 나가냐?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아침으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세수는 했냐? 따로 하고 싶은 건 없고?”

눈높이가 똑같은 여자애가 할머니 같은 말투와 아저씨 같이 큰 목소리로 자꾸 물었어. 시호는 입을 벌리며 말하려고 애썼어. 그런데, 역시 전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거야. 시호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방으로 도망쳤어. 저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지? 부엌에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어.

짭쪼롬하고 매콤한 간장냄새가 시호의 방까지 풍길 때쯤 시호는 목을 빼꼼 내밀고 주방을 쳐다봤어. 배가 너무 고팠거든. 산채이모가 비닐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손짓했어.

“와서 먹어봐! 메밀묵 무쳤다.”

‘불편해서 싫은데…’

문가에서 어물거리며 시호는 생각했어. 그런데 그때, 산채 이모의 뾰족한 귀가 크게 까딱거렸어. 귀를 움직이는 친구들이 있어서 놀랍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본 귀 움직이는 사람 중 제일 귀를 크게 움직이는 사람은 맞는 것 같았어. 산채이모는 메밀묵 한웅큼을 접시에 덜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시호에게 들려줬어.

“들어가서 먹으면 안 불편하지?”

시호는 고개를 끄덕였어. 산채이모는 주방으로 돌아가 손을 씻더니 보따리 안에서 뭔가를 꺼냈어.

“들리긴 들리는데, 좀 크게 말했으면 좋겠다. 요즘 귀가 어두워졌단 말이야. 자동차 소음 때문에.”

산채이모가 꺼낸 건 이상하게 생긴 방망이였어. 호미처럼 생긴 물병만 한 방망이.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던 산채이모는 방망이를 들고 다시 시호에게 다가왔어. 시호가 도망칠 틈도 없이 빠르게 다가왔지. 산채이모가 방망이를 훽! 휘두르고, 시호가 덜덜 떨다 넘어질 뻔한 그때, 시호 가슴에 방망이 끝이 살포시 닿았어. 산채이모는 시호를 잘 붙잡은 채 시호 가슴을 방망이로 톡톡 쳤지. 그러자 평소에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귀에 직접 들리기 시작했어.

‘우와, 죽을 뻔했네!’

시호 마음의 소리가 말이야.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어떻게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시호가 들고 있던 접시의 메밀묵을 낼름 집어먹은 산채이모가 말했어.

“이제야 좀 들을 만 하네. 배도 안 고프냐? 아침 뭐 먹고 싶냐니깐.”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병원에서도 이런 건 못 해줬는데!’

“도깨비 호미의 힘을 좀 썼지. 도깨비들은 숨은 것 찾기를 제일 잘 하거든. 그건 나한테만 들리는 거니까 알아서 조심히 말하고 그래라?”

시호가 아무 말 못하고 쳐다보니, 산채이모는 시호 입에 메밀묵 한 조각을 넣어줬어.

“김서방, 뭐 먹고 싶냐니까. 내가 알아서 만들까?”

‘대체 정체가 뭐예요? 어떻게 나처럼 어린데 마법을 쓸 줄 알아요?’

“나? 나는 산채! 산나물을 캐던 호미가 도깨비가 됐다고 산채라는 이름이 붙었지.”

‘도, 도깨비? 진짜 도깨비라고요?’

시호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산채이모를 톡 건드렸어. 산채이모는 연기처럼 사라지거나 꿈처럼 흐려지지 않고 멀쩡하게 시호를 보고 있었어.

‘우와... 도깨비는 태어나서 처음 봐요. 그래서 엄마아빠도 이모님을 어른처럼 대한 거예요?’

“나도 사회생활은 해야 할 거 아냐? 어른들 눈에는 어른처럼 보이는데, 어린이들한테는 내 원래 모습이 보여. 내가 애들이랑 노는 걸 제일 좋아해서 그래. 밥 먹자!”

산채이모는 시호가 좋아한다고 한 요리들을 모두 뚝딱 만들어줬어. 시호는 먹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먹으면서 산채에게 이것저것 물었어. 산채는 시호에게, 자길 이모라고 부르지도 말고 존댓말을 하지도 말라 그랬어. 애들이랑은 그런 걸 안 따진다나. 그래서인지 시호는 산채가 더 좋아지는 것 같았어.

‘왜 인간 세상에 왔어?’

“산에 사는 동물들이 자꾸 다쳐. 고속도로가 생겼거든. 그 친구들 병원비가 필요하기도 하고, 인간들이랑 노래하면서 놀고 싶기도 하니까 내려왔지.”

‘그럼, 왜 하필 우리 집으로 일하러 왔어?’

“저번 집을 나와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까치가 너희 집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해주더라. 나는 뭐든 잘 들으니 말이야. 네가 말을 못한다는 건 아까 와서 알았어.”

‘산채는 돈이 필요한 거지?’

“그렇지!”

‘도깨비는 금을 만들 수 있잖아? 금 나와라 뚝딱 하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요즘 금은 다 은행에서 관리해서 쉽지가 않아. 일제 때 다 캐가서 남은 것도 없고. 은도 마찬가지인데 그거 인간한테 파느라 실랑이 할 바엔 직접 나와서 버는 게 낫지.”

‘도깨비 방망이는 뭐든 할 수 있는 거야? 혹시 그걸로 내 목도 고쳐줄 수 있어?’

“내가 봤을 때, 네 목은 몸이 아니라 마음의 병 때문에 고장 난 거다. 답답해서 꽉 막힌 거지. 하고 싶은 말을 제때 못해서 그렇게 된 거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포기해서 힘이 축 풀린 것 같기도 해. 방망이로는 그런 걸 고쳐줄 수가 없어. 직접 낫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시호는 시무룩하게 숟가락을 내려놨어.

‘언제 나을지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산채는 주방을 정리하다 아! 소리쳤어.

“대신 효과가 있었던 방법들은 알아. 엄청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나면 막힌 게 뚫린다는 얘기도 있어.”

‘정말? 집에서 하면 시끄럽겠지? 노래방이라도 가야 하나?’

“근데 그건 산에 가서 해야 돼. 야호! 소리치고 돌아오는 메아리를 들어야 뻥 뚫리거든. 밥도 먹었으니 잠깐 갔다 올까? 우리 산으로 가자.”

시호는 신나서 허겁지겁 설거지하는 산채를 붙잡았어.

‘잠깐만! 나 오늘 학원 가야 돼!’

“일요일인데?”

‘점심 먹고 학원을 두 개나 가야 돼. 산에는 못 가... 너무 멀어. 엄마아빠가 허락을 안 해줄 거야.’

“학원에 가고는 싶어?”

‘아니, 가기 싫어...’

산채는 손을 닦곤, 갑자기 시호의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았어. 그리곤 보따리를 뒤져서 볏짚인형을 꺼냈어.

‘그거 되게 저주인형처럼 생겼다.’

“이걸로 네 분신을 만들 거야.”

산채가 인형에 머리카락을 묶자, 펑! 인형이 시호의 모습으로 변했어.

“이게 옛날에 홍길동이 쓰던 도술을 베껴온 건데... 이렇게 분신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딴 사람들은 분신이 뭔가 하고 있는 줄 착각한단 말이지.”

시호는 분신을 요리조리 살펴봤지만, 자기랑 다른 점은 하나도 없었어. 1학년 때 넘어져서 생긴 입술 흉터까지 똑같았거든.

‘이러면 진짜 다들 못 알아보겠는데?’

“학원 이름이 뭐야?”

‘시그마 수학학원이야.’

“들었지? 자, 걸어!”

인형은 척척 걸어 나갔어. 시호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산채는 방망이를 휘둘러 집안일을 해치웠어. 설거지, 청소, 빨래... 시호가 혹시 모를 짐까지 챙겨 나왔을 때, 집은 이미 반짝반짝 깨끗해져 있었어. 산채는 시호를 업고 베란다로 나가서 창문을 열었어.

‘무, 무서워...!’

“겁먹지 마! 어차피 우린 땅으로만 다닐 거야.”

산채는 뚝딱! 하면서 방망이를 휘둘렀어. 그러자 발밑이 바뀌고, 산채와 시호는 금세 학교 뒷산 정상에 서 있었어. 시호가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자 산채가 다시 방망이를 휘둘렀어.

뚝딱! 뚝딱뚝딱뚝딱!

‘이... 이것도 홍길동한테 배운 거야?’

“아니, 이건 홍길동이 나한테 배워간 거지. 그래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잖아.”

시호는 산채의 어깨만 꽉 잡고 있었어.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고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번갈아 가니 눈앞도 자꾸만 번쩍거렸어.

‘이렇게 가서 소리를 쳤는데도 병이 안 나으면 어떡하지...’

“걱정 마! 무조건 나을 테니까. 나을지 안 나을지 나랑 내기할래?”

‘좋아. 내가 나으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

“소원을 들어줄 능력은 있냐? 하하하.”

산 정상에 도착하자 산채는 도시락통에서 참치김밥을 꺼내 시호 입에 넣어줬어. 시호는 모든 게 꿈만 같았어. 이렇게 큰 산은 살면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거든. 둘은 정자에 가만히 앉아서 풍경을 구경하며 함께 김밥을 씹어 먹었어. 마음의 소리는 입이 막혀 있어도 나와서 시호는 한가득 김밥을 먹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었어.

‘여긴 어디야?’

“강원도.”

‘일산에서 강원도까지 온 거야? 우와!’

“여기가 우리 집이야. 조선시대 때부터 살았는데, 요즘처럼 산이 피곤해진 적은 없는 것 같다. 맨날 차 다니고, 골프장 지으려 하고... 어휴, 이사를 가야 하나...”

주변을 둘러보자 후다닥 뛰어 소나무를 올라가는 다람쥐, 느긋느긋 걸어가 바위에 눕는 고양이, 총총 뛰다가 멋지게 날아가는 까치가 보였어. 시호는 산의 풍경이 제일 잘 보이는 방향에 서서 눈을 꼭 감았어.

“이렇게 예쁜데 아깝게 왜 눈을 감아. 눈 뜨고 해! 배에 힘주고!”

시호는 한참 심호흡하다 산채의 말대로 눈을 떴어. 그리고 반짝거리는 산의 풍경을 보며 크게 외쳤어.

‘산에 있는 친구들이 내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

“야-호-!”

야-호-!

야-호-

“으하하하!”

“나 목소리가 나와, 산채야. 다시 목소리가 나와!”

시호는 산채를 붙잡고 폴짝폴짝 뛰었어. 그때 전화기 소리가 울렸어. 산채의 전화였어.

<여보세요? 산채 씨 핸드폰이죠?>

“예, 맞는데요.”

<산채 씨, 지금 어디세요? 잠깐 집에 왔더니 베란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쓰레기 버리러 가셨어요?>

시호가 부푼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어.

“엄마, 우리 지금 강원도야!”

<뭐? 시호니? 시호야, 너 지금 어떻게 말하는 거야? 네가 왜 거기 있어! 학원은 어쩌고!>

“엄마, 산채가 내 목소리를 고쳐줬어. 강원도에서 야호! 하니까 목소리가 돌아왔어!”

<강원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유괴 당했니? 저기요!>

산채가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말했어.

“일찍 돌아갈 거니까 걱정 말고 있어요. 잠깐 놀러 나온다고 큰일이 나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당신 아동유괴범 그런 거예요? 오늘 처음 본 사람 뭘 믿고 애를... 내가 미쳤지. 저기요, 당장 우리 시호 돌려보내세요. 지금 바로 안 돌아오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아시겠어요?! 시호, 시호는 무사한 것 맞죠. 시호 좀 바꿔봐요!>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시호는 한 번 뚫렸던 목이 다시 콱 막히는 것 같았어. 학교, 학원, 엄마아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어. 시호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어. 산채는 시끄러운 전화를 끊었어.

‘...집에 가자.’

시호가 마음으로 말했어. 산채는 한숨을 푹 쉬곤 시호를 업었어.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무리 그래도 네가 말을 하면 잘 들어줄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시호는 산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어.

“...난 그래도 김서방 목소리가 참 좋더라. 앞으로도 말 많이 하고 그래.”

시호는 축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어. 또 뚝딱 소리와 함께 집에 거의 다 돌아왔을 즈음 엄마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어. 어디냐는 물음에 산채는 아파트 단지에 다 들어왔다고 대답했어.

<시호 바꿔 보세요.>

“...엄마.”

시호는 어느 때보다 꽉 막힌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어. 대답을 안 하면 엄마가 정말로 산채를 경찰에 신고할 것 같았거든. 엄마는 시호 목소리를 듣자 안심이 됐는지 한숨을 쉬며 산채를 바꿔 달라 했어.

<산채 씨, 빨리 시호 올려 보내세요. 아무리 애가 학원을 가기 싫어해도 그렇지, 강원도에 갔다고 거짓말까지 시키면 어떡해요? 애 학원 마음대로 빠지게 하라고 고용한 줄 아세요? 오늘 일당은 바로 입금할 테니까, 집에는 들어오지 말고 돌아가세요. 만약 이대로 시호가 집에 안 들어오면 바로 신고할 겁니다. 아시겠어요?>

시호가 비척거리며 산채의 등에서 내려왔어. 산채는 “잘 가, 또 보자!”하며 소리쳤지만 시호는 마음의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속상했어. 집에는 엄마아빠가 모두 돌아와 있었고, 아빠는 시호를 크게 혼냈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따라갔다고 말이야.

“너 학원은 대체 어떻게 간 거니? 잘 도착했다고 문자가 왔었는데, 학원에 갔다가 놀러간 거였어?”

아빠가 물었어. 엄마는 계속 화를 내며 거실을 빙빙 돌며 말했어.

“아무래도 안 되겠어... 걱정 돼서 어떻게 살아. 역시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어.”

엄마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어. 시호는 고개를 번쩍 들며 엄마에게 외쳤어.

“신고하지 마!”

엄마아빠가 깜짝 놀라 시호를 쳐다봤어.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마음의 소리와 입의 소리가 동시에 콸콸 흘러나왔어.

“난 병원 약도 먹기 싫고, 학교 끝나자마자 학원가는 것도 싫었는데 산채가 처음 내 말을 들어준 거란 말이야! 내가 말할 수 있게 도와준 친구를 왜 신고해! 토요일, 일요일에도 학원가는 거 싫어, 매일매일 학원에만 있어야 하는 것도 싫어! 그냥 집에 혼자 있는 게 더 좋아! 이젠 나도 혼자 밥 챙겨 먹을 수 있어!”

시호가 엉엉 울면서 말했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말이 안 나왔단 말이야. 산채가 보고 싶어. 산채만 내 말을 들어줬어.”

“시호야, 너 말을 할 수 있었어?”

엄마가 급하게 시호를 안아 달래며 말했어.

“그런데 왜 말을 안 했니?”

아빠가 황급히 물을 떠 왔어.

“산채, 산채 덕분에 말하게 된 거란 말이야, 오늘... 산채랑 계속 놀고 싶어...”

“이모님이랑 벌써 그렇게 친해졌단 말이야?”

“윤시호, 그래도 학원 빼먹고 놀러 가면 어떡해? 아까 강원도였단 것도 사실 거짓말이었지? 아무리 놀고 싶어도...”

시호가 계속 산채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엄마는 아빠에게 산채에게 전화라도 걸어보라고 했어.

“여보, 전화를 안 받는데?”

“문자라도 넣어봐.”

“아니, 없는 번호라고 뜬다니까?”

시호는 엄마에게 안겨서 잠들 때까지 울었어. 그동안 말을 못했던 게 다 이만큼 쌓인 울음 때문이었나 싶을 정도로 울었어. 몽롱하게 잠이 들 무렵, 엄마가 사과했어.

“시호야, 앞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 말해. 엄마가 제대로 들어줄게. 미안해.”

시호는 까무룩 잠이 들었어.

김서방, 김서방...

“김서방!”

생뚱맞은 부름과 함께 시호는 눈을 떴어. 눈앞엔 파란 도깨비불이 둥둥 떠 있었어.

“산채? 산채야?”

“까치가 잘 풀렸다곤 말해줬는데, 그래도 걱정돼서 보러 와봤지. 괜찮아?”

“나 이제 말이 잘 나와. 네 덕분이야. 내기는 네가 이겼어.”

“그거 잘 됐네! 역시 우리 산에서 야호 외치는 게 효험이 좋아.”

“산채야, 다시 돌아와 주면 안 돼? 우리 집에서 같이 있자.”

“불편해서 안 되겠어. 돈도 받았으니 다른 집이나 다른 일을 찾아봐야지.”

“오늘 너무 재밌었어. 그래서 계속 같이 놀고 싶었는데...”

“그래? 그럼 내 소원 하나 들어줄래?”

도깨비불이 활활 타다, 갑자기 두 배는 부풀어서 시호에게 가깝게 다가왔어.

“뭔데?”

“앞으로도 나랑 계속 놀아주라!”

“산채 네가 우리 집을 나갔는데 어떻게 만나? 그리고 난... 앞으로 더 바빠질 거야. 엄마아빠가 학원을 줄이겠다곤 했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중학교에 올라가면 더 바빠질 걸. 지금보다도 더, 엄청.”

“내가 말하는 앞으로는 진짜 먼 앞으로야. 네가 어른이 된 후에도를 이야기하는 거야.”

도깨비불은 한참 꾸물거리다, “찾았다.”하곤 시호 앞에 종이를 툭 떨어뜨렸어.

“이게 뭐야?”

“같이 갔던 산 기억하지? 내 산의 인간식 주소야. 놀러왔을 때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면 나갈게.”

시호는 주소를 따라 읽다, 팔을 뻗어서 도깨비불을 꼭 껴안았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손에 만져졌고 어딘가 포근한 느낌이었어.

“꼭 다시 찾아갈게.”

“기다리고 있을게! 또 보자, 김서방.”

도깨비불은 포로로, 하는 희한한 소리를 내며 베란다 창문을 통과해 날아갔어. 불빛이 다 사라져 방이 어두워져도 종이는 그대로 남아 있었어. 시호는 종이에 쓰인 글자를 몇 번씩 읽다 잠에 들었어. 다시 뚝딱, 달려가서 야호 외치는 꿈을 꾸면서 말이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