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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리 Apr 15. 2024

보스의 잔소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딴생각에 몸을 싣고 리듬을 탈 것

회사에 희소식이 있을 때면 보스 사무실로 선물들이 당도했다. 선물의 대부분은 화분이었다. 화분들이 도착하면 보스 얼굴과 사무실은 환해졌고, 비서들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비서 입장에서 많은 화분들은 성가시기만 하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때맞춰 물 주고, 습도 맞추고, 잎 닦아주고 분갈이하는 등 주의를 기울여 신경을 써야 하니 말이다. 사무실엔 이미 동양란, 서양란, 테이블야자, 아레카야자, 홍콩야자, 소철, 자마이카, 그 외 미처 이름 모를 애들까지 줄줄이 미니 꽃집을 차려도 될 수준이었다. 성가신건 보스 하나로 족한데, 이게 다 무어란 말인가.


보스 사무실은 두면이 모두 창문이라 햇볕이 너무 많이 들어왔고, 실내는 늘 건조했다. 고층이라 열 수 있는 창문은 너무 작아서 사무실엔 바람 잘 들지 않았다. 게다가 늘 고함치는 보스가 있었으니, 여러모로 식물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악조건 속에서 식물들은 그럭저럭 살아가거나 가끔 죽었다.


관리하기 가장 까다로운 건 동양란이었다. 아침마다 분무기로 물을 주고, 정기적으로 관수를 해줘도 시들어가는 난들이 있었다. 뿌리가 초석잠처럼 옹골지고 연노란빛을 띠어야 건강한데, 시들해진 동양란의 뿌리는 썩어 뭉그러진 바나나 같았다. 그렇게 맛이 간 뿌리는 솎아내고, 아직 건강한 뿌리는 다른 동양란 화분으로 분갈이했다. 그렇게 드물지만 꾸준히 동양란 화분을 한 개씩 줄여나갔다. 보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 날 특별한 동양란이 선물로 들어왔다. 보스는 비싼 난이니 특별히 잘 관리하라고 했다. 원형 청자 도자기에 담긴 작은 난이었다. 기존 화분들과 모양이 정말 달라, 난이 죽어도 보스 몰래 바꿔치기는 불가능했다. 에이 망했네. 난은 죄가 없었지만, 달갑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식물들이 시들시들해지면, 보스는  <화분관리 잔소리 레퍼토리>를 읊었다. 식물 하나도 못 키우면서 뭘 할 수 있냐. 나무를 키울 줄 알어야 돈을 벌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화장실로 가져가서 물을 흠뻑 줘라... 정도로 요약되는 말을 아주 길게 혼띔하는 타령형 레퍼토리였다.


얼마 후 그 고급 동양란이 작고 흰 꽃을 피웠다. 보스는 아주 흡족해했다. 손님들이 올 때마다 그 동양란 꽃을 보여주며 자랑하셨다. 아이고. 저러다 저 난이 죽으면 우리도 보스한테 죽는 거겠지.


보스와 긴 출장을 다녀온 후 일이 터졌다. 후임은 거의 울듯한 얼굴이 되어 내게 와 말했다. 과장님, 관수하려고 난을 화장실 청소용 수채 세면대에 담가두었는데, 실수로 뜨거운 물을 틀었어요. 아이고. 화장실 수채 세면대 수도꼭지만 뜨거운 물 방향이 반대라 가끔 그런 실수가 있었다. 물을 틀어두고 다른 화분을 가져오는 동안 그 귀한 동양란이 뜨거운 맛을 좀 오래 본 것이다. 난은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지 뭐. 잘하려다 실수한 거니 괜찮아. 보스가 난이 왜 저러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보스는 분명 또 그 레퍼토리를 읊으시겠지. 그냥 그러려니 듣자. 보스에겐 레퍼토리가 있고, 우리에겐 그 대응 매뉴얼이 있어.


사무실에서 시들어가는 건 화분이면 족했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 수년째 버티고 있는 귀한 후임인데, 후임마저 시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보스의 질책은 예상된 수준에서 지나갔다. 우리가 예상했던 메들리는 2번 넘게 반복하셨다. 보스의 메들리가 시작되고, 우리는 미리 짠 매뉴얼대로 행동했다.


아래는 우리의 대응 매뉴얼.

(1) 고개 숙이고 전방 1m 앞 바닥을 보고 딴생각을 한다. 초점 없이 멍을 때리면 성의 없어 보이므로, 송구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중요. (2) 가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을 탄다. 웃음기 사라진 얼굴이 중요. 무표정 절대 지켜. (3) ‘네’ 이외의 말은 하지 않는다. 뭐라 말씀해도 토 달지 않고 가만있는 게 중요. 토다는 순간 메들리는 도돌이표로 무한반복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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