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권력, 교육, 침묵의 심연을 파헤치며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70년대 말, 서울에서 지방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 온 5학년 학생 한병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는 병태는 곧 엄석대라는 이름의 반장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는 표면적으로는 반의 질서를 잘 유지하는 모범생이지만, 실상은 물리적 폭력과 집단적 강압을 통해 반 전체를 장악한 ‘작은 독재자’다. 교사로부터는 칭찬을 받지만, 그 아래에 숨겨진 권력의 실체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에 저항하던 병태 역시 점차 고립되며 결국 타협과 순응의 길을 걷게 된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병태는 당시의 사건들을 회상하며 자신이 맞섰던 것, 또 외면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는다. 이 영화는 결국 한 아이의 성장 서사를 통해, 권력의 구조와 집단의 침묵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질서를 정면으로 조명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겉으로 보기엔 아동 성장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서사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정치적 은유로 작동한다. 초등학교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권력은 어떻게 형성되고, 누구에 의해 유지되며, 그 권력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엄석대는 또래 집단 내에서 절대적 권위자로 군림하며, 그의 지배는 교사의 묵인, 학생들의 침묵, 그리고 전체 체계의 방조 속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이는 단순한 학교 폭력 구조를 넘어서, 1980~90년대 한국 사회의 군사 독재 체제와 그로 인한 통제 사회를 압축적으로 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질서를 위한 통제’라는 명분 아래 정의와 자유는 쉽게 유보되고, 타협과 침묵은 생존의 방식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이러한 모순을 미니어처처럼 교실에 담아냄으로써, 권력의 비대칭성과 구조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냉철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은 집단 심리와 권력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반응을 다층적으로 탐색한다. 한병태는 새로운 외부인으로서 기존 체계에 의문을 품고 도전하려 하지만, 곧 좌절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자신이 비판하던 엄석대와 비슷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는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며, 권력이 인간의 도덕성을 어떻게 잠식하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아울러 교실 내 다수의 학생들이 보이는 집단 순응은 심리학 이론, 특히 아쉬(Asch)의 동조 실험이나 스탠포드 감옥 실험에서 보듯, 개인의 판단이 사회적 압력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침묵이 중립이 아니라 적극적인 동조의 한 방식임을 강조하며, 그 침묵이 만든 결과의 무게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돌려준다.
영화는 학교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교육은 본래 비판적 사고와 자율성을 길러야 하지만, 이 영화 속의 교사와 어른들은 갈등의 본질을 외면한 채, 겉으로 드러난 성적과 질서만을 중시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무비판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고, 진실보다는 결과 중심의 서열 경쟁에 익숙해진다. 결국 교육은 독립적 사고를 억누르고, 잠재적 권력자나 침묵하는 다수를 만들어내는 복제 기제로 전락한다. 엄석대의 존재는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그에 대해 방관하거나 무력한 어른들의 태도는 구조적 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를 낱낱이 드러내며, '교육은 중립적이지 않다'는 날카로운 경고를 던진다.
영화는 과거를 회상하는 프레임을 통해 한 개인의 내면적 갈등과 윤리적 성장을 조명한다. 어른이 된 병태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돌아보며, 그 시절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지를 끊임없이 반추한다. 그는 피해자였고 동시에 침묵의 공범이었으며, 어떤 순간에는 자신도 또 다른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영화는 단순한 추억이나 반성의 서사를 넘어서, 관객에게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이 성찰은 관객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동력이 되며, 영화를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닌 현재형의 윤리적 질문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표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권력은 어떻게 정당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질서 유지’라는 명분 아래 구축된 권력은, 그 실체가 폭력적일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수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 합리화되기까지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다. 단지 시대와 배경이 달라졌을 뿐, 타협과 침묵으로 정당화된 권력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이 덜 위험한 선택’이라는 환상에 갇혀 있다.
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교육은 정치적이며, 권력은 감시받지 않으면 타락하고, 침묵은 때로 가장 치명적인 공범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때의 침묵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영화는 어떤 이념적 선언보다는, 관객 스스로에게 던지는 개인적이고도 도덕적인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여전히, '그때의 교실' 속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