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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샛별 Jul 09. 2020

회사에 취하다

   마 전 만난 지인으로부터 ' 너 지금 회사 뽕에 취했네 '라는 말을 듣고 그렇지 않다며 부정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실 맞다. 회사에 취했다. 술에 취했을 때의 적당히 흥분되고 평소보다 많이 행복한 기분이다. 그래서 금방 깨고 싶지도 않다.

   회사에 합류해 적응해가는 과정이 연애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흔히들 말하는 '허니문'이다.



취-하다  醉하다

1. 어떤 기운으로 정신이 흐려지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되다.

2. 무엇에 마음이 쏠리어 넋을 빼앗기다.

3. 사람이나 물건에 시달려 얼이 빠지다시피 되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취하다'의 의미를 통해 지금 상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난 지금 회사에 마음이 쏠려 넋을 빼앗긴 걸까. 요즘 나는 분명 워커홀릭이라는 평을 들었던 과거 한 때와는 전혀 다른 상태다. 

   당시에 늦은 밤까지, 주말에도 일하는 내 모습이 다른 동료들에게 일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을 순 있지만, 일에 취해있지는 않았다. 나의 일과 회사의 일을 분리하는 건 아주 쉬웠다. 그때 맡았던 업무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에게 큰 가치를 가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빠져든 대상은 '일'이지 회사가 아니었다.


   연애 초엔 모든 일들이 행복의 이유가 되듯, 회사에 취한 지금도 모든 게 새롭다. 생각했던 대로여서, 또는 생각과 달라서, 그 각각이 또 하나의 취할 거리가 된다. 아직은 나쁜 점이 보이지 않을 시기다.

   최근 전 회사 친구를 만나 대화하다가, 전 직장에 입사했던 처음 몇 달도 지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4년 전이 되어버린 추억. 모든 것이 새롭고 마냥 좋았던, 콩깍지가 씐 날들.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이젠 저 멀리 지나간 허니문.

   


   필터 씌운 사진처럼 아름답기만 했던 나날이 지나가면 비로소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결혼은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연애가 흘러가듯 비슷하지 않을까. 때로 맘에 들지 않는 단점이 보이고, 그 때문에 싸울 일도 생긴다. 친구를 만나 함께 흉보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두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곁에 있으면 또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크고 작은 짜증이 생기며 싸우는 반복.

   회사도 그렇다.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채워지고, 무지개 같았던 풍경이 회색조로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답답함이 쌓이기 시작다. 한 사람의 연인보다 훨씬 거대하고 내가 설득하거나 움직이기 어려우니 그 답답함을 해결할 방법도 쉽게 떠오르지 않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도 회사도 문화도 완벽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곳에서는 같은 시기 -예를 들면 연인 사이의 권태기-를 걸어가더라도 덜 힘들고 지칠 것 같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첫 번째는 순수함 때문이다.


   조건이나 배경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 하나로 만나는 연인과 같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 빠르게 승진하는 것,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회사의 비전에 공감한다. 그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기대하고, 내가 함께할 수 있게 된 데 감사한다.

   비전이 없는 회사는 없건만, 그 꿈이 내가 하는 일과 닿아있다는 느낌은 처음이다. 누군가의 꿈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에 일하는 방식 속에서 목적지이자 방향이 된다. 일상의 대화에도 회사의 비전이 묻어나고, 각자의 비전과 할 일이 어떻게 연결고리가 되어 우리의 꿈에 가까이 가는지 모두가 새기고 있다.  공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말 한 방향으로 일하는 건 너무 새로운 경험이라 이것만으로도 꽤 긴 허니문 기간을 보낼 것 같다.



두 번째는 기본 때문이다.


   입사 후 첫 면담에서 내게 하고 싶은 일이나 성장하고 싶은 방향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면담과 회의에서 계속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묻는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를 챙기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회사의 처음을 함께한 창립멤버도, 팀장도, 팀원도 모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이 일상이다.

   이게 기본이다. 연애를 포함한 모든 관계의 기본.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받고 싶어 하는 것을 줘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갖고 싶은 게 뭔지 알려면 계속해서 묻고 대화해야 한다.


   목소리를 듣겠다며 형식적인 행사만 치르고, 결국은 생색처럼 자신이 내줄 수 있는 만큼만 주는 건 차라리 아예 당신의 말 따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나쁘다. '왜, 뭐, 왜, 들어줬잖아!'라고 적반하장으로 화내는 연인 같다고 느낀다면 비약일까. 구성원의 의견을 '귀'로만 듣고 머리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거나 고민하지 않는 간담회들은 누굴 위한 시간낭비일까.

   이 곳에 온 첫날 가장 놀란 건 첫 일정이었던 전사회의였다. 모든 구성원이 회사의 소식을 알기 위해 한 공간에 모인 것도 새로웠지만, 정작 큰 건 따로 있었다. 나의 지난 11년간의 회사생활에서 물리적 사무공간, 조직개편 따위는 항상 '통보'였다. 그런데 그 날 발표한 한 팀의 이름과 역할 조정 공지에 모든 구성원들의 질의응답이 30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 팀 구성원들의 경우 이미 논의를 통해 합의한 내용인데도, 팀 밖의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우려와 제안을 표했다.

   구성원의 의견과 대표의 의견이 위와 아래가 아니라 수평한 방향에서 만나고 타협점을 찾아간다. 회의의 다른 주제들을 한 주 미루면서까지 시간을 할애하고, 그것이 일상적이라는 팀장의 귀띔에 신기하다며 웃었다. 아마 그게 이 회사에 취한, 아니 반한 순간이었을 거다.

   곧 예정된 사무공간의 이전도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고, 내가 합류한 후 그 짧은 기간에도 투표를 통해 자율출근제 도입이나 전사 휴가 일정 같은 결정이 이뤄졌다. 정말 많은 투표와 의견청취가 있지만 번거롭지 않은 것은 내 의견이 정말 쓰이기 때문이다. '응 얘기해'라며 휴대폰만 바라보거나 딴짓을 하는 대화 상대가 아니라, 의자를 바짝 당기고 귀를 열어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공동의 꿈을 공유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존중한다. 어쩌면 사람 사이에는 당연한 그 일들, 관계의 기본과 순수함 때문에 난 회사에 취해있다. 


   취한 김에 주정 부리듯 자랑이나 조금 더 하자면... �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곳은 모두가 함께 각자 원하는 성장을 이루어내며 가는 길을 찾는 데 더 큰 의미를 둔다. 어쩌면 비효율을 감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기업의 본질은 이윤추구라는 말에 언제나 '하지만'이 이어진다. 이윤추구만을 위해 달리지는 않는다. 구성원 각자가 성장하고 있다면, 회사의 성장과 금전적 이익은 따라온다고 믿는다. 회사와 구성원의 관계는 이 기본 때문에 끈끈하고 신뢰도 단단하다.


   흔히 연인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을 봐야 한다고 한다. 내가 뭘 받을 수 있을지보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하는 이 관계가 더 건강하다고 믿는다. 이 건강한 관계에 내가 더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지금의 이 취한 상태가 허니문이어서가 아니라 이 곳이 전체적으로 너무 달달해서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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