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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샛별 Oct 07. 2020

꿈이 간지럽히는 순간

내 이야기가 드라마가 되다 


    지나간 여름의 어떤 날, 그동안 경험해보지 않았던 계약을 했다. 작년에 독립출판으로 펴낸 <잔이 비었는데요>의 일부로 웹드라마를 제작하고 싶다는 회사와 진행한 저작물 이용 계약이었다. 처음 연락을 받고 제작하려는 드라마의 취지에 대해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누구에게든 알리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만큼 기뻤다. 

    때때로 지나가고, 가끔은 머물러서 시간을 보내던 집 근처 쇼핑몰 야외 광장에서 계약서 작성과 구체적인 내용 논의를 위해 제작사 담당자들을 만났다. 뒤에 예정된 저녁 약속이 있어 조급한 마음으로 미팅에 갔지만, 드라마로 만들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는 시간이 멈춘 느낌이었다. 책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내용과 후일담을 이야기하면서 금세 다시 과거의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미팅을 마치고 급히 달려가 탑승한 지하철에서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마스크 아래로 싱글벙글 웃었다. 오랜만의 뜀박질에 가슴이 뛰는 건지, 기분 좋은 설렘으로 빠르게 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날 저녁,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안내받은 좋아하는 술집에서 즐긴 음식과 맛있는 대화가 어제처럼 생생하다. 계약서에 사인하느라 빌렸던 펜을 집에 돌아오는 길 가방 속에서 발견하고 아차 싶었던 것도. 



    길었던 장마로 촬영이 늦어지겠다는 생각을 여름의 중간에 한두 번 했었지만, 이 생각으로 가득한 계절을 보내진 않았다. 이미 출간한 지 1년이 지난 책이었고, 여전히 애착은 있지만 이제는 서점에서도 첵의 얼굴보다는 등을 내보이는 편이 더 많은 게 당연한 시기였으니까. 다만, 처음 책이 나왔을 때의 설렘을 조금은 데워보고 싶었다. 코로나 19가 제 의도와 달리 선물한 '시간'을 한가득 받고도, 글을 쓰기보다는 읽는데 더 많이 써온 여름이었기에. 

    평생 꿈이라고 생각했던 책 출판을 한 이후로, 나조차 눈치채지 못하도록 깊이 숨겨온 꿈들이 때때로 거품처럼 수면 위에 떠올랐다. 오디오북을 만들고 싶기도 했고, 어렸을 때의 꿈이었지만 영상 콘텐츠로 내 글이 새롭게 태어나는 걸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 이후 얻었던 설렘과 기쁨이 다소 흐릿해져서일까, 다음 책에 엮을 글들은 조각난 채 흩어져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아직은 아득해 보였던 영상 콘텐츠의 기회가 지난여름, 먼저 내게 왔다. 


    7분 28초에 불과한 단편 영상이지만 30여 년이 걸렸다고도 할 수 있고, 내 인생에서 약 3시간 남짓한 소개팅 경험만 담았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 생생하게 오래 기억될 페이지일 수도 있다. 독립출판에 이어 알린 웹드라마 제작 소식에 지인들로부터 많은 축하를 받았지만 예전 같으면 겸손한 대답으로 했을 '운이 좋아서'라는 말만은 일부러 참는다.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 기쁨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모아 다음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데 쓰고 싶다. 

  



    어제 퇴근 후 집에 돌아오는 길 공개된  <여끄니 2편 : 잔이 비었는데요> (영상은 유튜브 링크!)에는 수년 전의 어린 내가 있다. 아직도 며칠 전처럼 생생한 그 날의 소개팅이 깨알 같은 디테일과 함께 영상에 담겼다. 씻고 나와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를 마시며, TV 너머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비우는 웹드라마 속의 다른 샛별이를 보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짜증 섞인 하소연을 하며 집에 돌아가던 20대의 나는 그 날의 짧은 순간이 내 이름으로 만들어진 책에서 가장 긴 에피소드가 될 줄 알았을까. 그 소개팅 자리가 웹드라마가 되어, 30대 중반의 내가 퇴근 후 맥주 한잔과 여전히 곁에 있는 고양이 앞에서 다시 되살아날 줄 알았을까. 

    그러니 이 드라마의 제목처럼 계속 엮어가야겠다. 일상의 단조로움과 특별함을 짜임새 있게 엮어 가다 보면, 오늘처럼 멀게만 보였던 꿈이 바로 내 곁에서 날 먼저 간지럽히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새로운 계절이 오기까지 많은 날들이 스쳐갔다. 이제 여름의 흔적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오늘 날씨는 조금 전 공개된 영상이 내게 더욱 책갈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상하리만큼 짧으면서 긴 2020년의 가을이,   이제야 제대로 펼쳐진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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