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에는 연말정산을 한다. 세금을 더 내거나 돌려받는 그 연말정산이 아니라, 한 해를 돌아보는 스스로의 회고다. 보통 가장 친한 친구들과의 송년회에서 각자의 올해 목표 정산을 공유한다. 목표 중 이룬 것들과 아쉬웠던 것들을 밝히고, 내년에 이루려는 목표를 이야기한다. 연말이면 각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시상식처럼 나름대로 우리끼리는 매년 반복되어 진짜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인 셈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유독 만나기 어려웠던 한 해, 목표했던 것들을 이루기도 어느 때보다 어려웠던 2020년이 이제 몇 시간 남았다. 공간은 달라도 늘 12월의 어느 날 진행했던 우리들의 송년회는 올해 처음으로 가상공간에서 진행했다. 화상 미팅 프로그램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올봄에 처음 경험했는데, 송년회까지 이런 형태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누가 알았을까!)
내가 작년 연말에 세웠던 2020년 목표 중 일부는 이뤘고, 여행을 포함해 몇 가지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도 올해 기억에 남는 일들을 정렬해보니 답답한 일상 속에서도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엔 너무 크고 슬펐던 이별도 있었고, 이직처럼 앞으로의 내 방향을 바꿀 만큼 크고 중요한 일도 있다. 작년에 낸 독립출판물 <잔이 비었는데요>에 이어진 웹드라마나 북페어 같은 새로운 경험도 있었고, 그동안 매년 목표에 있었지만 매번 이루지 못했던 목표를 최근의 집콕 생활 중 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 기억에 남는 발자국들 맨 아래 적어둔 한 마디가 나의 2020년을 요약한다.
"코로나 19로 많이 아쉬웠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2020년 (내가 뽑은) 올해의 책
올해는 이직으로 5월 말에 2주 정도의 방학이 생겼다. 그때는 해외여행도 못 가는 2주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소중했다!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 중이었지만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심각하진 않았으니까. 그 방학을 포함해서 집콕으로 외부 약속이 거의 없어지면서 올해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출판을 진행한 작년에는 글을 쓰느라 책을 많이 못 읽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올해는 그래서 더 풍성했다. 학생 때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책을 읽은 1년이다. 이것도 코로나 19가 가져온 (그나마의) 긍정적인 부분일까.
<세탁소 옆집(말하면 다 현실이 되는)> - 조윤민, 김경민
: '세탁소 옆집'이라는 보틀샵의 존재는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세계 최초 알코홀릭 인텔리전스(AI) 맥주 슈퍼라는 소개가 인상 깊어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했다. 당시에는 AI팀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라 지겹도록 들었던 AI라는 단어가 그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다만, 접근성을 핑계로 (코로나 19가 아니어도 난 워낙 집순이 스타일이라) 실제로 방문한 적은 없었다. 대신 우연히 책을 알게 되었는데 집 근처였다면 거의 아지트처럼 들락거렸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나 사이드 허슬, 즉 주업은 따로 있는 상태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현실 불가능한 꿈'의 영역에 미뤄두었던 '술 파는 책방' 같은 것들이 불가능하진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 내가 오늘 당장 행동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행동하고 꾸준히 유지해가고 있는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 감사하다.
트렌드 키워드에서도 최근에는 '부캐', 또는 '멀티 페르소나'가 빠지지 않는다. 연예계에서도 다양한 '부캐'들이 활약했다. 연예인들만 '부캐'를 가지란 법이 있나! 나도 다양한 '부캐'를 가지고 싶고, 그게 세탁소 옆집의 운영자들처럼 또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물론 본업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고, 충분히 그 정도의 프로정신은 있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의 다양한 부캐 중 '지미유'가 가장 매력적이었다.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제작자라는 새로운 영역이었기에. 나도 새로운 영역에서 나의 다음 일을 발굴하고 싶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작년에는 내가 스트레스받는 분야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대부분의 책들이 '마음 챙김'이나 '리더십'에 대한 내용이었던 게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경향성이 크지 않았고, 특히 이직을 기점으로 독서량이 엄청나게 늘었기에 독서목록에서 스트레스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소설을 한 편 완성하는 목표를 위해 일부러 소설을 많이 찾아 읽었다. 고전부터 최근 주목받고 있는 작품들까지.
베스트셀러 서가에서 발견해서 읽은 이 책은 올해에 내가 만난 소설책 중에 가장 매력적이었다. 책에 포함된 모든 소설이 너무 놀라운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이 과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 설정들인데,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후에 김초엽 작가가 이공계 출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야기가 끝난 이후 주인공들의 삶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좋은 소설이 주는 여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세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느낀다.
이 책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이 그랬고, 그 각각의 세계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도 몇몇 이야기가 주는 여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운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쓰는 이야기의 세계가 정말 단단하게 꾸려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소설이지만 소설 아닌 감상으로 끝난 책.
<구글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 OKR> - 크리스티나 워스케
: 새로 합류한 회사에서 목표 달성 방식으로 OKR을 쓴다고 해서 이직 전 방학에 읽은 책이었다. 업무 방식에 대한 책이지만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따라가며 보여주고 있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특히 '모든 회사들이 각자의 목표 달성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왜 OKR인가?'라는 의문에 독자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책을 읽은 후, 새 회사에서 OKR로 일하는 것이 기대도 되었지만 가장 큰 감상은 아쉬움이었다. 직전 프로젝트에서, 또는 직전에 함께했던 팀에서 OKR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만 지나간 일을 아쉬워하는 건 술자리에서 한 두 번 푸념이면 됐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다음을 보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새 회사에서 기대한 것을 넘어서 정말 이상적으로 OKR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 조직의 목표를 세우는 데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어떻게 동작하고 얼마나 큰 가치를 갖는지, 모두 한 방향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게 실제 얼마나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가는지.
입사하고 온보딩 과정에서 나의 OKR을 고민하면서, 나는 내 삶의 2020년 버전 OKR을 따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기회와 선택 앞에서 명확한 기준과 지향점이 있다는 건 꽤 든든하다. 조직의 일하는 방식을 참고하려고 읽은 이 책이 '일하는 방식' 대신 '살아가는 방식'을 제안해 준 셈이다.
<팩트풀니스> - 한스 로슬링
: 꽤 긴 리뷰를 썼던 책이기도 하고, 데이터 분석가로서 경계해야 할 점이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했던 책. 두꺼워보이지만 사례들이 많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자세한 독서 리뷰는 이전 글에. (https://brunch.co.kr/@secreties86/40)
2020년 올해의 노동요
올해의 노래를 선정하기에는 평소 음악을 자주 듣는 편도 아니고 최신곡에는 더더욱 느려서 노동요에 한정해서 꼽았다. 오랜 시간 이어폰을 꽂는 게 답답해서 오래 음악을 듣지 않는 편인데 올해는 재택근무와 거리두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꽤 많은 시간을 음악과 함께했다.
<Dynamite> - BTS
: 방탄소년단 노래는 많이 들어보지도 잘 듣지도 않았었는데, 올해 발표된 이 노래는 취향저격이었다. 미국 시장에서도 워낙 히트한 노래라 취향저격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한 것 같긴 하지만. 출퇴근길에 들어도 재택근무 중에 들어도 유쾌했다. 덕분에 내 유튜브 뮤직에서도 올해 많이 들은 노래로 단연 높은 순위를 지킨다.
<Don't touch me> - 환불원정대
: 함께 웃고 울 수 있었던 프로젝트 그룹 환불원정대의 노래. 가사도 입에 잘 붙고 멜로디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너무 익숙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멋대로 한다는 노랫말이 너무
<Do you hear the people sing?> - Les Miserables Cast
: 전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뮤지컬 영화의 OST나 뮤지컬 넘버를 들었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귀를 막은 채 이런 노래를 들으면 뮤지컬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현실을 잠시 떠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 노래는 영화 속 혁명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많이 봤던 부분이라 현실도피에 최적이었다. 올해 이 노래의 가사까지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는 건 그만큼 스트레스가 많았던 증거가 아닐까. 그래도 이직 후 최근까지는 한 차례도 찾아 들은 적이 없다는 게 놀랍다.
<추억의 미니홈피 BGM 베스트> - 유튜브 뮤직
8월 중순 시작했던 재택근무를 방탄소년단과 함께 했다면 11월 말부터 시작한 이번 재택근무는 추억의 브금과 함께다. 내 음악 취향이 올드하다는 걸 유튜브가 또 (!) 알아낸 건지 이 재생목록을 추천해서 거의 고정으로 듣고 있다.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진 않지만 가끔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