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고
처음에는 신선했다. 방송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그의 시니컬한 말투와 표정이. 그저 신선하기만 했다면 아마 금방 잊었을 것이다. <마녀사냥>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땐 칼럼니스트로 소개되었던 것 같다. 당시 꽤 인기가 있었던 프로그램을 계속 보면서 그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됐다. '무성욕자', '영화광', '스타워즈 덕후' 같이 그저 방송 속 모습을 소비하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 말고도 그가 어떤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다. 매섭게 벼린 칼날처럼 글을 쓸 것 같은 사람이었다.
허지웅 작가가 2014년에 <버티는 삶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출판했을 때 바로 구매해서 읽었다. 꽤 인상 깊게 읽었던 모양인지 책장에 꼭 박제하겠다는 내 트윗을 이제는 쓰지 않는 트위터 계정을 들춰보다 발견했다. 아쉽게도 이사를 거듭하면서 정리한 책에 들어갔는지, 지금은 그 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한 가지 이미지는 명확하게 남았다. 제목에 포함된 '버틴다'는 말이 주는 부담과 고통 섞인 무게감 때문에 조금 거부감이 느껴졌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 '나 때는 더 했어,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거야' 같은 꼰대 멘트를 길게 쓴 책은 아니라는 것. 그의 전작에 대해 기억하는 건 그 정도였다. '버티고 버티어 끝내 살아냅시다'라는 허지웅 작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은 한 문장과, 한동안 내 책장을 채워주었던 개나리 같은 노란 책등을 제외하고는.
그 사이 허지웅 작가는 투병 소식을 알렸고, 항암치료를 마친 후 한결 편해진 얼굴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새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게 된 건 인스타그램에서 마음에 꽂히는 글을 발견했고, 그게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의 오프닝 멘트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항암과 투병을 이어가다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순간을 포함해 큰 일을 겪고 조금은 달라졌을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리고 7년 전 그랬듯, 그의 책을 읽는 동안에는 여러 차례 읽기를 멈추고 (7년 전에 책장을 덮었던 대신, 이북 리더기 전원을 끄고) 생각에 빠지게 됐다.
전작에서도 그랬듯 저자는 버티는 삶을 강조한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졌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예전에는 우리는 모두 혼자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괴로움의 느낌이었다. 바람과 물살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단단히 발을 고정하는 외로운 나무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그래서 끝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게 된 자신을 발견한 후, 그가 말하는 버티는 삶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깨에 기대고 서로 얽혀 지키고 버텨내는 모습이 그려진다.
몇 가지 기억하고 싶은 조각들을 떠올리며 엮어본다. 이 문장들이 언제든 다시 내게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문단 앞에 굵게 표시한 것은 인상 깊었던 글의 꼭지다. 내용은 저자의 문장 일부에 내가 소화하고 결심한 내용을 덧붙였다. 허지웅 작가 자신의 경험의 폭을 보여주듯 많은 영화와 책이 함께 소개되는데 삶의 태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거창한 결론은 삶을 망치지만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거창한 결론 (예를 들면 죽음, 또는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나만의 명제)을 세워두면 모든 것들은 결론에 맞춰진다. 저자는 결론이라는 간단한 피난처를 만들어두면 나머지 일들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 된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결론 앞에 죽음 외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때를 직접 경험했기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소한 결심들이 우리를 바꾸고 나아가 삶의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체 없는 결론보다는 내가 만지고 바꿀 수 있는 결심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이 훨씬 낫다.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이를 끊임없이 돌이켜보며 책임을 돌릴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찾는다고 한다. 나는 피해자로, 그리고 상황이든 다른 사람이든 무언가 나에게 피해를 입힌 대상을 찾으며 계속 고통스러운 불행을 복기하는 것이다. 그 인과관계를 명백히 규명하려는 노력은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저자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라고 말한다. 찾을 수도 없는 원인이나 가해자를 찾아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이를 수습하고 감당해내고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글 <만약에>에서는 계속해서 그 고통 속에 자신을 몰아넣는 모습에 대해 나온다. 저자 자신도 경험했던 일이고,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다. 흔히 하는 '이불 킥'조차 의미 없는 '만약에'가 아닌가. 여기서는 영화 <라라랜드>를 통해 의미 없는 '만약에'의 상상을 말한다. 이 부분에 나는 만약의 세계에 빠져드는 대신 현실을 살자고 메모해두었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자 약속이기도 하다.
이 부분을 읽으며 2년 전 '마음 챙김' 수업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최근 가장 불행한 일과 행복한 일을 적어보는 걸로 연습을 시작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이 행복한 일이 나에게 특별히 일어난 것인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반대로 이 불행했던 일은 나에게 하필 일어난 것인지,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 자신이 겪은 행복한 일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불행한 일은 하필 나에게만 닥친 불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과 상황을 이야기하고 나면 깨닫는다. 나에게만 닥친 것 같은 불행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고, 심지어 이미 경험한 사람도 많다. 반대로 행복한 일은 나만 겪은 경우가 상당수다. 사소하지만 모두에게 통용되고 비슷한 행복을 주는 경험이란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수업에서 배울 점은 우리는 대체로 내게 찾아온 행복은 당연한 것으로, 반대로 불행은 나에게만 닥친 비극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수업의 마지막은 상황을 인식하는 내 태도를 반대로 바꾸는 연습이다. 이 행복이 아무나 겪을 수 없이 내게만 찾아온 것이라면 훨씬 더 놀랍고 커진다. 반대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 불행의 크기는 사소해진다.
불행을 끊임없이 내 속에서 반복하는 '만약에' 대신 태도를 바꾸는 결심을 하자. '만약 이랬다면' 없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미 일어난 불행을 다시 떠올리는 대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오늘 내게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일이 일어난 순간에 내 기분을 망칠 순 있어도 그 이후의 내 기분은 내가 결정한 대로 바꿀 수 있다. 단지, 만약의 세계에 들어서지 않기로 결심하면 된다.
책의 뒷부분에서 저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불행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을 얻게 되든 그것은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영원회귀'라는 개념이 나온다. 우리가 죽으면 똑같은 인생을 다시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구절을 이해하고 토할 뻔했다고 썼고 나 역시 꽤 충격적이어서 바로 그 책을 다음 읽을 목록에 올렸다. 니체는 바로 그 운명론적 공포에 맞서라고 말했다. 이 삶이 똑같이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제목만 봐도 흥이 나는 <아모르파티 : Amor Fati>도 니체의 이 사상과 연결된다. 나는 과연 기쁘게 '좋아,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라인홀드 니부어가 쓴 유명한 기도문이다. 여기서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저자는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와 연결한다. 이 삶이 계속 똑같이 반복되더라도(영원회귀) 이 운명을 사랑하며(아모르파티) 제대로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전에는 위버멘쉬를 '초인'이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은 직후에 읽기 시작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초인으로 나온다. 올해부터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어 사전을 찾아보니 단순히 Über가 '~의 위에, ~를 넘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사람을 뜻하는 Mensch와 결합해 번역된 게 아닐까 싶었다. 영문판에서는 superman으로 번역되기도 했다고 하니, 내용을 곱씹으며 그 의미를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앞서 살펴본 불행을 대하는 태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불행 대신 '이미 일어난 것'으로 생각해보면 명료하다. 이미 일어난 것에 '만약에'를 반복하며 자신을 괴롭히거나 의미 없이 탓할 대상을 찾을 필요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지막 줄의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꿔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는 끊임없이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다. 저자도 니부어가 이 기도문을 쓴 것이 이 마지막 구절을 위해서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기도를 통해서든 지속적인 고민과 연습을 통해서든, 우리는 스스로 극복(위버멘쉬)할 문제인지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인지 분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이 필요하다.
그의 삶을 면밀히 관찰하게 된 느낌이 드는 에세이를 읽으며, 그가 삶을 대하고 싶은 태도를 읽은 것 같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장황한 설교 대신에 평범하고 날 선 한 사람이 아프고 후회하고 배우면서 극복해가는 모습을 행간에서 찾게 된다.
전작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버텨야 한다. 버티고 버텨서 살아남아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스스로 증명하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고통의 반복 대신 내 결심과 결정으로 이어지는 선이었으면 좋겠다. 똑같은 삶이 한번 반복되는 영원회귀를 찬미하기까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번 생은 망했다'는 자조가 서로의 삶에 웃음과 위로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