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몬 후유지의 <불씨>를 읽고
최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일이 많았다. 1월부터 참여한 인터뷰 프로젝트(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이전에 나를 완성한 것은 질문이었다 에서 다뤘다)에서 마주한 여러 질문들 때문이기도 하고, 허지웅 작가의 책 <살고 싶다는 농담>과 거기서 소개해 읽게 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책 리뷰를 쓴 내 기분은 내가 결정한다 에 담겨있다)
이미 내가 원하는 삶의 태도나 지향점은 어느 정도 만들어졌다. 덕분에 20대에 비해서는 안정적으로 항해하고 있으리라. 그래도 여전히 타인의 삶을 책을 통해서 배울 점은 많다. 그중에서도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도몬 후유지의 <불씨>를 갑자기 다시 읽고 싶었다.
<불씨>는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사내 기자단으로 활동할 때 인터뷰를 위해 처음 읽었던 책이다. 인터뷰 대상인 임원으로부터 임직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미리 확인하고,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기획 인터뷰였다. 그때 내가 맡은 분이 이 책을 추천했다. 내가 속한 조직의 리더이기도 했고, 평소에 좋은 분으로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어떤 책일지 궁금했는데, 처음 듣는 제목의 두 권짜리 소설이었다. 출판된 지 꽤 오래된 책이라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구하기도 어려워 예약주문을 해서 겨우 받았던 기억이 있다.
두 권이라 인터뷰 전까지 읽고 질문을 준비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소설 형식이고 진행도 흥미로워 금방 읽었다. 처음 가 본 집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는 내가 해석한 의미를 질문하고, 그분의 답변이나 생각을 들으며 다시 한번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1:1 독서모임 같다고 해야 할까. 당시에 작성했던 인터뷰 기사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회사를 떠나 할 수 없기에, 책을 한 번 더 읽기로 했다. 이번에도 읽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따라가며 생각하거나 새긴 점은 더 많았다.
<불씨>는 일본 에도시대에 실존했던 요네자와 번(藩)의 번주 우에스기 요잔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당시 일본은 260개 이상의 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각 번은 지금의 도쿄에 해당하는 에도 막부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번주를 중심으로 한 개별적인 정부가 꾸려져 운영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번주는 한 도시국가의 왕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될 것 같다.
요네자와 번은 재정파탄 상태에 이르러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더 이상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진 지 오래다. 유일한 방법은 번을 에도 막부에 반납하고 자치적인 운영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재의 나라' 요네자와 번의 새로운 번주가 된 우에스기 요잔이 만들어 낸 기적 같은 변화를 다룬다.
주인공인 우에스기 요잔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 책을 기업 경영의 참고서로 홍보했던 모양이다. 띠지에 있는 "이것이 진정한 CEO다"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눈을 사로잡는데, 국가든 기업이든 잘 꾸려가는 경영 전략에서 공통점이 많기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파괴적 혁신' 같은 말들이 유행이었고, 이 책을 추천한 임원 분도 개혁과 혁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불씨>를 추천했다.
이번에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요잔이 만들어낸 개혁과 혁신의 방법보다는 그걸 이루어내기 위한 리더십이나 태도에 더 집중했다. 처음 읽을 때 요잔의 틀을 깨는 발상에 신선함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그 불씨를 기꺼이 회색 잿가루 같았던 사람들에게 전달해내 요네자와 번을 다시 타오르게 만든 그의 말과 행동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요잔에게서 배운 것을 조직이나 국가가 아니라 '나'를 경영하는데도 쓸 수 있도록 소화하려 했다.
책에서 요잔이 희망이 없는 '재의 나라' 요네자와 번을 재건하고 타오르는 불로 만들기까지 했던 일이나 과정의 행동에서 배운 점을 내 나름대로 정리했다. 책 리뷰이므로 줄거리를 소개하는 대신 나의 소화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만약 조직이나 삶의 개혁에 관심이 있거나,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힌트를 얻고 싶다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내가 처음 책을 구했던 때와 다른 판본이 나왔는지 최근에는 구하기 쉬운 것 같다. :)
요잔은 처음 개혁을 준비하면서 심복에게 주류에서 밀려나고 미움받아 가장자리를 떠도는 번사(번의 무사)들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회생 불가능한 상태의 재정파탄을 만든 기존의 주류 무사보다는 입바른 소리로 미운털이 박혀 권력에서 밀려난 이들이 개혁 추진에 큰 힘이 될 것이라 믿었다.
회사에서는 개혁보다는 '혁신'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때에 따라 환골탈태를 한다거나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로 혁신TF가 생기는 일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회사에서 '혁신'이 붙은 조직은 가장 혁신적이지 않은 일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일단 이런 조직의 구성부터가 혁신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부분 기존에 있던 조직을 이끌던 리더들과 차, 부장들로 구성되고 한두 명의 후배 사원들이 자리를 채운다.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한 '혁신'을 기존 방식을 만들고 유지해왔던 사람들이 맡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 '혁신'이 될 리 없다. A 대신 B가 필요한 상황에 A' 나 a를 만들어 낼 뿐이다.
요네자와 번 본국에 모든 번민과 대부분의 번사들이 살고 있지만, 에도 막부의 영향을 받고 있던 당시 일본 봉건 사회의 특성상 에도(현 도쿄)에도 번저가 있었다. 특히 번주의 아내는 마치 볼모처럼 에도 번저에 머무르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일부의 번사들만 머무르는 만큼 규모는 훨씬 작았을 것이다. 요잔은 만들어진 개혁안을 소규모인 에도 번저에서 먼저 실행했다. 그리고 2년 간 꾸준히 실험하며 개혁안을 다듬고 비로소 본국으로 향했다.
'린 스타트업'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최근에 대기업에서도 많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시도의 속도와 방식은 스타트업을 따라가기 어렵다. 나는 대기업에서는 'Test&Learn'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일을 하는 전담 조직에 있었고, 작년부터는 스타트업에서 '린 스타트업', 'MVP', '프로토/프리토 타이핑', '실험'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일하고 있다. 어떤 표현을 쓰든 '빠르게 시도하고 그 결과로부터 배운 점을 반영해서 제품에 반영'하는 방식의 핵심은 실패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완성품 이전에 먼저 시도해보는 건 미리 문제나 시장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똑같은 일하는 방식이 내가 경험한 대기업에서는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던 것은 그 실패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Test&Learn을 표방했지만 실패할 실험은 하지 않았다. 실패한 실험은 그 존재 자체가 숨겨지기도 했다. 실패해선 안 되는 실험을 하는 조직이라면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이 성공했다는 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만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 개혁과 혁신은 불가능하다. 실패를 제대로 하고, 거기서 배운 점으로 더 나은 답을 찾아가야 한다.
요잔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아래와 같은 네 가지 골자를 정했다.
- 번정의 궁핍한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것
- 그 실태를 모든 번사에게 알릴 것
- 실태 극복을 위하여 목표를 확실히 세울 것
- 그러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번주의 능력으로 한계가 있으므로 번사 전원의 협력을 부탁할 것
요잔은 본국에서 개혁을 진행하기 전에 모든 번사들을 불러 모았다. 하급 무사들까지 모두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며 중신들이 반발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혁의 중심이 될 모든 번사들이 직접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 번주들은 솔직하게 공개하지 않았던 정확한 재정 상태를 알렸다. 이 상태라면 에도 막부에 번을 반납하고 요네자와 번의 역사를 여기서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도 솔직하게 공개했다. 자신의 약점 (양자라는 것 등) 까지도 모두 공개하고 모두의 협조를 부탁했다. 무사들은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번주의 모습에도 놀랐다.
'상황이 안 좋긴 하지만 문제없다, 해결할 수 있다'는 중신들의 호언장담을 번주가 그대로 믿었다면 그런 변화를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그럴 상황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조직을 위험에 빠뜨린다. 위기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거나 더 큰 위기로 밀어 넣는 셈이다. 특히 리더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조직원들을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위기를 솔직하게 말하고, 필요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요잔이 실행한 개혁안 중 하나는 새로운 부가가치 산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른 번에 비싸게 팔릴 잉어를 키우거나, 뽕나무를 심어 직물을 만드는 등의 다양한 것들을 제안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며 생산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는 무사들에게 이를 제안했는데, 보수적인 중신들이 펄쩍 뛸 일이었다. 오늘로 치면 문서작업과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무사들의 일이었고, 농사나 직물 같은 일들은 생전 해본 적도 없던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요잔은 무사들의 마당에 뽕나무를 심으라고 명령하는 대신 가장 먼저 자신의 마당에 100그루의 뽕나무를 심었다. 무사의 계급에 따라 마당 평수가 달라지는 만큼 제일 많은 뽕나무를 심은 셈이다. 물론 초반에는 반감을 가진 중신의 자제들이 이를 몰래 파헤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점점 요네자와 번 전체에 퍼져나갔다. 말만 앞서고 실행은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리더라면 그가 말하는 혁신이 피부에 와 닿을 리 없다. 소설에서 요네자와 번에 개혁이 일어나는 상징으로 계속 나오는 '불씨'는 요잔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존 체제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던 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변화에 저항한다. 특히 중신들은 오랜 기간 요잔의 개혁에 반대하고 끊임없이 방해해왔다. 요잔은 그런 이들을 강제로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천천히 자신의 개혁을 밀고 나갔다. 그 핵심에는 '백성을 위한 번정을 하면 나라의 중신이 반대해도 번민이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는 요잔뿐만 아니라 개혁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한 문장이다. 당장 눈 앞의 목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향해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공유해야 한다.
요잔이 말한 '백성을 위한 번정'은 지금 '고객을 위한 제품', '구성원을 위한 리더십'으로도 대응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회사들이 고객을 중심에 둔다고 말하고, 리더들도 당신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최우선에 두고 움직이는지는 잘 지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지가 명확해야 하고 그것을 모두 공유해야 한다. 지향점이 명확하다면 선택의 순간이나 반대를 마주했을 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요잔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번민들을 직접 만나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집행관의 부패를 감지한 것이다. 개혁 초기부터 함께 해왔던 가장 믿음직한 동료였던 그의 타락은 요잔에게 큰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의 나쁜 변화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본인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다른 믿었던 동료들에게도 큰 충격을 받았다.
집행관은 이를 다그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한 일이 '변화를 빠르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변명한다. 자기가 모두를 대신해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힌 거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요잔은 단호히 말한다. 빠른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침통한 마음으로 집행관을 처벌한다.
변화를 일으키고자 할 때 꼼수의 유혹은 언제나 아른거린다. 옳지 않더라도 나쁜 것은 아니라며 합리화하게 되기도 한다. 요잔에게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시도는 빠르게 하되, 방법에서 빠른 길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옳은 방법이어야 오래간다. 오래 이어갈 수 있어야 진정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그 과정도 인상적이다. 처음 자기 마당에 뽕나무를 심었을 때 이를 몰래 파헤쳤던 중신의 아들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자신의 동지나 다름없던 집행관의 타락을 숨기거나 알게 모르게 처리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개했던 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 리더는 없다. 다만 자신의 실수를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리더라야 믿고 따를 수 있다. 물론 요잔 자신의 실수는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함께한 동료의 흠결을 처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반감을 가졌던 중신의 아들들도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된다.
혁신과 변화에는 많은 방법이 있고, 이를 다루는 책도 다양하다. 과거,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일본의 역사에서 빌린 요잔의 리더십이 인상 깊었던 것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과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기어이 올바른 방식으로 만들어낸 혁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주한 어떤 환경이나 조건도 요네자와 번을 맡게 된 17살의 청년 번주 요잔보다는 낫다고 느낀다. 그가 벽을 넘어서며 기어이 만들어낸 변화의 불씨와 결국 타오르게 만든 혁신의 불길에 감탄할 또 다른 이유다. 패배의식에 젖은 무사들에게 불씨를 옮기고 반대하는 이들까지 포용해낸 요잔의 리더십은 지금도, 앞으로도 좋은 가이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