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적 가격 조정’이라는 신종 완곡어법의 유행
요즘 기업 실적 발표를 듣다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듭니다.
가격이 올랐다는 얘기인데, 누구도 “가격을 올립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런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surgical price increases(수술적 가격 인상)”
“pricing actions(가격 조치)”
“price realization(가격 실현)”
“higher revenue per liter(리터당 수익 증가)”
“price pack architecture(가격·용량 설계)”
단어는 점점 정교해지는데, 소비자가 체감하는 현실은 단순합니다. 결국 더 비싸졌다는 것.
마크 리슨(Mark Ritson)이 꼬집는 건 ‘가격 인상’ 자체가 아닙니다.
가격 인상을 말하는 방식이 점점 더 소비자를 바보로 취급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세(tariff)가 비용을 올립니다. 기업은 선택해야 합니다.
비용을 스스로 흡수할 것인가
소비자에게 전가할 것인가
대부분은 후자를 택합니다. 여기까지는 놀랍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 다음입니다. 전가를 ‘전가’라고 부르지 않는 순간.
나이키 CFO는 “관세로 연간 약 10억 달러 비용 증가”를 설명하며 해법을 “수술적 가격 인상”으로 포장합니다.
마치 소비자를 위해 정교한 의료행위를 하는 듯한 어조죠.
마텔은 “가격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제품의 40~50%는 20달러 이하”라고 안심시킵니다.
듣기엔 착한 가격 정책 같지만, 그 말의 그림자는 이겁니다. 나머지 절반은 오른다는 뜻.
리바이스 역시 “targeted and surgical pricing increases(표적·수술적 가격 인상)”을 꺼냅니다.
관세가 마진을 깎으니 누군가가 지불해야 하고, 그 ‘누군가’는 결국 소비자라는 얘기인데 말은 매끈합니다.
세 브랜드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가격이 올랐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올랐다는 효과는 유지하려 한다.
기업의 본능은 이해할 만합니다.
가격은 숫자이지만, 소비자가 지불하는 건 숫자보다 ‘느낌’이니까요.
행동경제학·가격 심리학이 반복해서 보여준 핵심은 이겁니다.
소비자는 “정가가 원래 얼마였는지”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고
가격은 제시 방식(프레이밍), 맥락(컨텍스트), 기준점(앵커)에 크게 좌우됩니다.
그래서 기업은 가격 인상 자체보다, 가격 인상을 어떻게 보이게 할지에 에너지를 씁니다.
문제는 이 프레이밍이 어느 순간부터 소비자가 아니라 애널리스트·투자자·언론을 향해 과도하게 최적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제 프레이밍은 매장 선반(shelf)이 아니라, 실적 발표(IR)에서 더 화려해졌습니다.
여기서 리슨이 인용하는 핵심 연구 포인트가 아주 날카롭습니다.
가격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해온 라이스대의 우트팔 돌라키아(Utpal Dholakia)가 내린 결론은 단순합니다.
가격 인상은 ‘가격 인상’이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완곡어법은 단기적으로 충격을 줄이는 듯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고객 관계를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압니다.
인플레이션이 뭔지 압니다.
관세가 비용을 올린다는 것도 압니다.
브랜드가 “가격 인상”을 숨기려고 할 때 느껴지는 그 미묘한 태도도 압니다.
그래서 소비자가 화나는 지점은 종종 가격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겁니다.
“올릴 수밖에 없으면 올린다고 솔직히 말하면 될 걸, 왜 나를 속이려 하지?”
그리고 한 번 ‘기만’으로 인지되면, 그때부터는 어떤 프레이밍도 프리미엄이 아니라 불신의 증거가 됩니다.
마진을 방어하려고 시작한 언어의 기술이, 브랜드 자산을 갉아먹는 순간이죠.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리슨은 “프레이밍을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투자자·시장에는 전략적으로 설명하라(가능)
하지만 소비자에게는 지능을 모욕하지 말라(필수)
즉, 두 대상에게 같은 언어를 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IR 문법을 그대로 소비자 문장으로 가져오는 순간, 브랜드는 “정직한 가격”이 아니라 “얄팍한 변명”을 팔게 됩니다.
가격이 오르는 건 피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격이 일부 조정됩니다” ❌
“일부 제품 가격이 인상됩니다” ✅
“원가 상승”처럼 뭉개기보다
“관세/원자재/물류비” 등 핵심 요인 1~2개만 명확히
동일 가격대 옵션 유지(엔트리 제품)
구독/번들/리필 등 체감 부담을 낮추는 선택지
‘가격을 올린다’가 아니라 ‘선택지를 넓힌다’로 전환
소비자는 납득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함에 대한 평가는 훨씬 일관적입니다.
관세든 인플레이션이든, 비용 압박은 앞으로도 반복될 겁니다.
그때마다 브랜드는 또다시 가격을 올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고객이 기억하는 건 숫자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라고 넘어가게 만드는 솔직함
혹은 “또 말장난하네”라고 등을 돌리게 만드는 회피
가격 인상을 ‘수술’처럼 포장하는 시대에, 가장 경쟁력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고전적입니다.
“가격이 올랐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 한 문장이, 마진보다 더 비싼 신뢰를 지키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