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소렐이 말한 AI, 미디어 투명성, 그리고 에이전시 업계의 균열
광고업계는 지금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거대 에이전시 그룹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고, 광고비 역시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성장의 공식은 깨졌고, 수익 구조는 복잡해졌으며, AI는 업계 전체의 가치사슬을 다시 쓰고 있다.
이 변화의 한가운데서, S4 Capital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마틴 소렐(Martin Sorrell) 은 매우 직설적인 진단을 내놓았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지금의 광고대행사 모델은 이대로 지속될 수 없다.”
한때 WPP를 세계 최대 광고 지주사로 키워낸 인물이자, 현재는 디지털 중심의 S4 Capital을 이끄는 소렐은 최근 인터뷰에서 AI, 미디어 투명성, 대형 지주사 간 갈등, 그리고 업계 구조조정까지 폭넓게 언급했다. 그의 발언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2026년 광고업계가 어떤 압박 속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진단서에 가깝다.
과거 광고업계에는 비교적 명확한 공식이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실적이 좋아지면 광고비가 늘고, 광고비가 늘면 대행사도 성장한다는 구조였다. 기업 이익과 광고 지출, 그리고 대행사 매출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상관관계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소렐은 오늘날 광고비 증가가 더 이상 GDP나 기업 수익성과 같은 전통적 경제 지표와 강하게 연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기업들이 돈을 벌더라도 그 돈이 예전처럼 마케팅으로 바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히 테크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광고나 브랜딩 같은 운영비가 아니라, AI 개발을 위한 자본 지출에 쏟아붓고 있다.
이 변화는 광고대행사에 꽤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광고대행사의 성장은 결국 클라이언트의 마케팅 지출 확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기업들이 성장을 위해 마케팅보다 기술 투자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즉, 문제는 광고시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광고대행사가 과거처럼 가장 먼저 예산 증가의 혜택을 가져가는 구조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소렐은 현재 마케터들이 매일 아침 맞닥뜨리는 현실을 “불쾌할 정도의 불확실성”이라고 표현했다.
관세 이슈, 인플레이션, 지정학적 긴장, 중동 분쟁 같은 외부 변수들이 길게 이어지면서 기업들은 공격적으로 예산을 집행하기보다 관망 모드에 들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주들은 대형 캠페인이나 장기 투자보다,
보다 짧고 유연하며 성과 중심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문제는 광고대행사 비즈니스 모델 상당수가 여전히 인력 중심, 프로젝트 중심, 관계 중심 구조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시장이 불확실할수록 광고주는 더 빠른 의사결정, 더 정교한 비용 통제, 더 명확한 성과 증명을 원하지만, 전통적인 에이전시 모델은 이런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결국 지금 업계가 맞닥뜨린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에도 기존 대행사 모델은 여전히 유효한가?”
소렐의 대답은 사실상 “아니다”에 가깝다.
광고산업은 오랫동안 창의성과 관계의 산업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금 클라이언트가 가장 예민하게 보는 것은 아이디어만이 아니다.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얼마에 샀는지, 누가 얼마를 남겼는지.
즉, 미디어 투명성(media transparency) 이다.
소렐은 최근 퍼블리시스(Publicis)와 더트레이드데스크(The Trade Desk) 사이의 갈등 역시 본질적으로는 이 문제라고 봤다. 겉으로는 플랫폼 신뢰도와 감사 이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광고 집행 과정의 가격 구조와 마진 구조를 얼마나 투명하게 드러낼 것이냐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 포인트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광고주는 점점 더 “성과를 잘 내주는 파트너”를 넘어, “내 예산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 파트너” 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 광고주일수록 감사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대행사의 전문성을 신뢰하고 일정 부분 블랙박스를 용인했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 클라이언트는 더 구체적으로 묻는다.
미디어를 실제 얼마에 샀는가
수수료는 얼마인가
리베이트나 할인은 누구의 것인가
플랫폼 선택은 누구의 이익을 기준으로 이뤄졌는가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순간, 에이전시의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근 광고업계에서 반복적으로 논쟁이 되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principal-based media buying이다.
쉽게 말하면, 에이전시가 미디어를 직접 구매한 뒤 이를 클라이언트에게 다시 판매하는 구조다.
이 방식은 분명 효율성이 있다.
대행사가 여러 클라이언트를 묶어 더 좋은 조건으로 매체를 확보하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방식이 더 나은 가격과 조건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소렐 역시 이 구조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핵심은 구조의 유효성보다 이익 배분의 정당성이라고 본다.
매체사로부터 얻은 할인이나 혜택은 누구의 것인가?
에이전시가 가져가도 되는가, 아니면 클라이언트에게 돌려줘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긴장이 생긴다.
에이전시는 “우리가 협상하고 구조를 설계했으니 일정 부분의 이익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광고주는 “그 거래는 결국 내 예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principal-based buying의 핵심 쟁점은 단순한 운영 방식이 아니라,
투명성, 설명 책임, 그리고 신뢰의 문제다.
소렐이 가장 강하게 언급한 주제 중 하나는 역시 AI였다.
그는 AI가 광고업계에 위협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다만 위협의 속도가 훨씬 빠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가 AI에 의해 빠르게 대체되거나 압축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영역은 비교적 명확하다.
비주얼 제작
카피라이팅
개인화
미디어 플래닝
미디어 바잉
이 공통점은 모두 반복 가능하고, 데이터 기반 최적화가 가능하며, 규칙화하기 쉬운 업무라는 점이다.
즉, 광고업계의 핵심 기능 중 상당수가 AI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경쟁 구도가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광고대행사의 경쟁자가 다른 대행사였다면, 이제는 구글·아마존 같은 하이퍼스케일러가 광고주를 위한 올인원 AI 솔루션을 구축하고 있다. 지금은 중소 광고주 대상 기능이 중심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형 광고주 영역까지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
이 말은 곧, 에이전시가 단지 내부 효율화를 고민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들의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점은 소렐이 AI 자체에 대해서는 꽤 낙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AI가 조직의 비효율을 줄이고, 사일로를 없애며, 더 빠르고 유연한 운영 구조를 만드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된다고 본다.
실제로 S4 Capital은 Monks.Flow라는 AI 기반 서비스도 내놓았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진짜 병목은 기술이 아니다.
클라이언트가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법무 검토, 내부 승인 절차, 기존 워크플로우, 부서 간 장벽 등으로 인해 많은 브랜드가 AI 도입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실행 단계에서는 주저한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단순히 좋은 툴을 먼저 도입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변화관리(change management)
둘째, 워크플로우 단순화(workflow simplification)
이 메시지는 마케팅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AI를 잘 쓰는 브랜드는 툴을 많이 산 브랜드가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를 줄이고, 실험을 빠르게 반복하며, 조직이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도록 만든 브랜드다.
소렐은 옴니콤(Omnicom)의 IPG 인수를 두고 “방어적 합병(defensive merger)”이라고 평가했다.
이 표현은 꽤 상징적이다.
광고업계에서 대형 M&A는 오랫동안 성장 전략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규모를 키우고,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합병은 예전과 결이 다르다.
지금의 합병은 공격보다 생존과 비용 절감의 성격이 더 강하다.
성장이 둔화된 시장에서 인력과 기능을 통합하고, 중복 조직을 줄이며, 수익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소렐이 특히 문제 삼은 것은 이런 구조조정 과정에서 드러나는 업계의 냉혹함이다.
대규모 인력 감축, 효율화 목표, 그리고 조직 운영 방식은 광고산업이 더 이상 화려한 창의성만으로 설명되는 산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광고대행사도 철저하게 생산성, 원가 구조, 기술 투자 효율로 평가받는 시대에 들어섰다.
소렐의 발언을 하나로 정리하면, 광고대행사의 위기는 단순한 경기 침체나 일시적 성장 둔화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구조적인 변화다.
업계를 흔드는 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광고주의 예산 구조가 변했다.
브랜드와 캠페인에만 돈이 몰리던 시대가 아니라, 기술과 데이터, AI 인프라가 예산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둘째, 투명성이 경쟁력이 됐다.
이제 클라이언트는 잘해주는 파트너보다, 설명 가능한 파트너를 원한다.
셋째, AI가 역할 분담을 다시 쓰고 있다.
제작, 운영, 플래닝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에이전시의 전통적인 수익모델도 압박받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남는 에이전시는 어떤 곳일까.
아마도 다음 세 가지를 갖춘 조직일 가능성이 높다.
기술을 도구가 아니라 운영 구조로 내재화한 곳
투명성을 비용이 아니라 신뢰 자산으로 보는 곳
인력 중심 조직에서 워크플로우 중심 조직으로 전환한 곳
이제 광고회사의 경쟁력은 “얼마나 유명한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고, 얼마나 명확하게 설명하며, 얼마나 효율적으로 실행하는가에 가깝다.
마틴 소렐은 원래도 직설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 발언이 유독 의미 있게 들리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남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업계 전체가 피하기 어려운 현실을 정면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대행사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과거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광고대행사의 시대는 빠르게 저물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광고업계의 승부는 더 이상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더 많은 회사를 보유했는지보다,
누가 더 투명한 구조를 만들었는지,
누가 더 빠르게 AI를 조직 안에 녹여냈는지,
그리고 누가 더 유연하게 클라이언트의 불확실성에 대응하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다.
결국 지금은 광고산업의 위기가 아니라,
광고산업의 운영 방식이 바뀌는 전환기에 가깝다.
그리고 소렐의 말처럼,
이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