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해서 나 역시 친절했다.

김시헌 신작 시.

by 김시헌


당신을 사랑해서 나 역시 친절했다.




멀었던 길도

너의 손을 잡으면 모자란 길이 되었다.

뜬 눈으로 꿈을 꾸던 나의 두통은

너의 따뜻함에 눈 감았고

무릎 위 같은 자리

같은 모양의 흉터가

전생에 우리가 하나였던 증거라는 너의 말에

나는 몇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바다를 좋아하고

너도 산을 좋아해서

바다에 세워진 산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컵라면을 먹으며 맞았던 시원한 바람도

우리에겐 충분한 행복이었다.

나의 것들을 네가 좋아하고

너의 것들을 내가 좋아하게 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헤어졌다.


싸울 일도 없었고

마음이 식은 것도 아니었지만

인연은 그것만으로 운명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약속했던 시간들은 오지 않았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낯섦이

우리를 싣고 떠내려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눈빛으로 인사를 하고

앞으로의 행복을 빌며 헤어졌지만

헤어진 후에도 즐거웠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지워내며 너를 잊어가고 있지만

나는 아직 울지 않았다.

당신은 항상 친절했고, 내가 물으면

나를 사랑해서 더 친절해진다고 말해주던

당신에게

나 역시 친절할 수 있었음을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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