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경험 around number 37
수년 전, 서른일곱 살 생일에 어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약 네 달 전에 신청했던 책이 공교롭게 딱 그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숫자와는 무관한 그 책에서 37 어쩌고 하는 연구에 관해 언급하는 걸 발견했다. 우연이 괜히 필연처럼 느껴져서 리딩 리스트에 올려 놓고도 바로 읽지는 못했는데, 얼마 전에 드디어 차례가 되어 찾아봤다.
유전자 코돈과 관련된 아미노산의 핵자 수가 퍼즐을 맞춘 것처럼 깔끔하게 수치적으로 정리되는 패턴을 발표한 논문이었다.
64종 코돈에 관여하는 20개 아미노산을 선행 연구자들이 제안한 방식대로 그룹을 나눈 후 정의한 방식에 따라 핵자수를 각각 더하면 여러 경우에 마치 설계된 것처럼 37의 배수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패턴을 발견했다고.
논문의 재료는 유전자 코돈이지만 저자들이 일단 물리학 연구소와 수학과에 속한 사람들이다 보니, 지구생물학자들이 반길 만한 내용은 아닌 모양이다. 논문이 실린 저널부터가 태양계 과학을 주제로 삼으니까 우주생물학인가.
'데이터 피싱data fishing'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논문의 부록에는 그에 대해 항변해 놨지만.) 쉽게 말해서, 가설과 그 검증법을 먼저 치밀하게 세우고 치우침 없이 랜덤하게 조사하여 검증한 값이 아니라 그럴듯한 결과로 이끄는 데이터가 걸릴 때까지 계~속 낚시하듯 탐색해서 걸린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결과치만 갖다 놨을 뿐이라는 뜻이다. ... 그래도 이 저자들이 밝히려는 내용(코돈의 코드가 정교한 규칙을 갖게 되는 경우의 조건)을 생각했을 때 일반적인 가설 검증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할 연구는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보자.
주류의 반응이 어쨌건 결과는 걸작이다. 퍼즐인 줄 몰랐던 퍼즐 조각을 어찌어찌 맞추니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이 드러난 느낌이랄까. 저자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조각만 갖다 쓴 거잖아, 라고 하기엔, 조각을 오려낸 것도 아니고 아미노산을 유리하게 골라낸 것도 아닌데 배열만 맞춘다고 그림이 딱 그려지는 것도 신기한 일 아닌가 싶다.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구석구석까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좌절스럽고, 익숙지 않아서일 뿐인지도 모르나, 의도적으로라도 이렇게 짜맞출 수 있는 조건이 코돈에 잠재돼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유효한 조건에 대한 결과만 찾아서 보여줬다는 방법론적 문제는 차치하고, 데이터 자체의 조작(오려서 짜깁기한 조각)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이들이 Activation Key라고 칭하는 'Proline의 사이드 체인에서 수소 원자 하나를 땡겨와서 계산하기'인데- 프롤린만 유일하게 엄밀히 아미노산이 아닌 이미노산imino acid이라는 점에서 미뤄보면 논문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 같고 말이다. 꿈보다 해몽,일지도 모르나, 황당한 꿈이라 해서 꼭 들어맞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뭐...
저자들이 짐작하는 외계 지적 존재의 흔적일 가능성은 비약인 만큼 말 그대로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인 채로 두고 (만약 37이 성경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가진 숫자였다면 창조론자들은 필시 '신이 인간을 창조한 증거'라고 할 것 아닌가...어라. 종교와 무관한 곳에서도 인기가 많은 숫자인 듯하지만, 혹시나 하고 예수를 비롯한 성경적 게마트리아를 찾아보니 37의 배수로 범벅이다. 다만 이쪽은 그야말로 억지스러운 데이터 피싱도 섞여 있다ㅋ ... 두 설을 조합하면...-_-;;아빠는 외계인...?), 데이터 자체에 거짓이나 오류가 없는 이상, 가감 없이 팩트는 팩트로 두면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서른일곱 살 생일이 계기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 논문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순수한 소감을 말하자면, 신기하고 재미있다. 인생은 역시 타이밍인가. 덕분에 37이라는 숫자의 오묘한 매력에 대해서 진득히 알게 된 것도 소득. 덤으로, 논문에서 언급된 숫자들 중에는 내 삶에 우연히 영향력을 갖게 된 다른 숫자도 엮여 있어서 '네가 여기서 왜 나오냐'며 웃었다. 센스 있는 농담 같달까. 저자들로서는 그냥 '이거 우리가 발견했는데- 선행 연구들에 따라 코돈을 나누고 특정 값들을 합산하니까 이쪽이랑 저쪽 값이 거울 상태가 되고 이러저렇게 일치하고, 37의 배수가 계속 나오더라? 그래, 바로 그 매직 넘버 37 말이야. 그것도 10진법이 아니면 이 분명한 패턴이 없어진다구. 신기하지, 그치, 그치? 꼭 무슨 히든 메시지처럼 누가 이렇게 몰래 설정해 놓은 것 같지 않아?'라고 신이 나서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연구의 설정과 절차와 미상의 진실이 어떻든간에 내가 그들이었어도 그 사실을 발견했을 때 입이 떡 벌어지며 흥분했을 것 같은데, 애초에 '깔끔한 패턴'이란 것을 마주하면 남들보다 강력한 정신적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학자(정확히 수학자인지는 입수한 정보상 불확실하지만)와 물리학자가, 그 화학반응에 촉매제로 작용할 신비의 숫자에까지 딱 걸렸으니 응당 그랬으리라. 흐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들어갈 법한 내용 같기도 하고.
아. 꼬리를 물고 생각나는 게 있다. 옛날에 종종 드나들었던 동물실험실에서는 적외선 센서를 초단위로 기록했었는데, 사용했던 소프트웨어의 초단위 설정이 십진법으로 프로그래밍된 탓에 오차가 자꾸 났다. 시간은 60진법이니까. 프로그래머가 아무리 소수점 아래로 길고 정교하게 수정을 해줘도 십진법 체계는 그대로라서 2주일쯤 데이터가 쌓이면 결국 필요한 분량보다 넘치든지 모자라고 타임라인이 밀려버리는 탓에 데이터 보정 작업을 해야 했다. 인터넷 시간과 동기화할 수 있으면 서로 편했겠지만, 어차피 당시 실험실 인터넷 환경이 좀 불안정했던 걸로 기억한다. (단 몇 시간이라도 데이터를 날렸다간 몇 주간의 헛고생과 연쇄적 스케줄 차질과 구멍 난 연구비가 울화병을 유발할 터.)참고로 60을 황금비로 나누면 거의 딱 37이 된다. 호오...
*표지 사진: 제임스 웹 망원경의 작품
https://www.youtube.com/watch?v=1_9NINZ-Wd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