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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Nov 19. 2021

들으려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말

국립극장 NT Live,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매 해 설과 추석 근처 즈음에 국립극장에서는 NT Live라는 이름으로 이웃나라 영국의 국립극장에서 열렸던 공연 실황을 카메라에 담아 상영해준다. 연극 실황을 영화처럼 상영하면 연극이라 해야 할지 영화로 소개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꼼꼼히 선별한 작품을 빈틈없는 시선으로 필름에 담으면 매체와 관계없이 결국 호감이 남는다. 지난 연애의 이벤트는 이제는 나의 습관이 되어 명절이 다가올 때쯤이면 국립극장 소식에 귀 기울이게 된다. 산 중턱에 걸린 해오름 극장에서 가을과 겨울의 정점을 만나는 기쁨을 알게 해 준 그에게 해마다 두 번씩 감사하다.


 NT Live가 열리는 시기는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때때로 눈이 쌓인 계절이라 공연 전 후로 남산 숲길을 거니는 맛이 있다. 이걸 즐기는 것 까지가 온전한 공연 감상이라고 볼 수 있다. 상영 시간이 120분에서 180분 사이, 주차 우대 시간이 4시간인 건 우연이 아닐 거다. 그날은 NT Live로 <시라노 드베르주라크>를 보고 나와 남산 둘레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바뀌는 것과 관계없이 내 마음속에는 신비한 눈동자에 섬세한 손끝과 어깨를 가진 <어톤먼트> 속 로비로만 남아있던 청년 제임스 맥어보이는 세월을 온화하게 피부에 감싼 모습으로 시라노가 되어 연심을 랩 하고 있었다. 둘레길 양옆으로 늘어진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마다 우수에 찬 제임스 맥어보이 얼굴이 그려져서 도무지 산책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목표로 하던 옛 목멱산방 자리는 무리겠다며 돌아 내려오던 길이었다. 7명으로 구성된 맹인 일행이 스틱을 더듬으며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무언가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근처에 찾을 만한 게 눈을 뜬 내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상황을 더 모순되게 만들었다. 내게 보이지 않는 그게 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걸 그들은 아는 것 같았다.

 "건너편에 정자가 있다고 했는데."

 아, 정자를 찾는 거로구나. 정자라는 단어가 들리고 나서야 정자가 보였다. 그도 그럴게 그 정자라는 놈이 어찌나 수풀 속에 꽁꽁 숨어있는지 그들이 찾는 게 정말 저건가 의구심이 일었다. 정자 입구 코 앞까지 와서 스틱이 닿는 방향을 바꾸는 상황을 몇 차례나 지켜보다가 결국 참견하고 말았다.

 "조금 더 앞으로 가세요. 네. 거기요."


 무리는 느리지만 결국 가려던 곳에 도달해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자리 잡는 걸 몰래 지켜보고 가던 길로 돌아서는데,

 "건너편에 정자가 있습니다."

 둘레길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안내방송은 내가 올라가던 길에도 나왔을 테지만 그 목소리가 낯설었다. 그녀가 하는 말의 내용도 서먹했다. 자주 들려주지 않으면 쓸모가 없겠는데 생각하던 찰나에 방금 들었던 성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렇게 수다스러운 반복을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소리로 볼 일이 없는 내게 안내방송은 자체적으로 묵음이었다. 혹시 들었더라도 저게 도움이 될까 의심했을 게 선했다.


 시라노는 건조해진 바람에 단풍이 물들듯 자연스럽게 사촌동생인 록산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지성과 외모를 찬양하는 록산의 이상형을 듣고 자신감을 잃는다. 원작에서 코가 큰 추남으로 그려지는 시라노를 맡은 제임스 맥어보이는 코가 크지 않은 미남이라 이 역에 적임자인가 싶지만, 이를 상상력으로 채워 예쁜 제임스 맥어보이의 얼굴에 추한 가면을 씌워주는 것이 관객의 역할이다.

 시라노는 흉한 얼굴에 가려져 자신의 세레나데가 온전히 닿지 못할 것을 우려해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빌어 사랑을 노래한다. 크리스티앙은 자신에게 남은 것이 외모 하나뿐일까 봐 긍긍하며 시라노의 세레나데를 외운다. 이 노래는 초반에는 록산에게 완전하게 전달되는 듯했으나, 편지로 만나면 충만하고 실물로 만나면 갈증 나는 크리스티앙의 태도에 아쉬움만 들어찬다. 그리고 이 헛헛함을 시라노에게 털어놓을수록 시라노는 더 격렬한 사랑을 적어 크리스티앙의 주머니에 꽂아주고, 크리스티앙은 더 큰 격차로 벌어진 남의 마음을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다.

 극은 시종일관 진실을 듣고 싶은 자와 알리고 싶은 자의 잡히지 않는 추격전을 비추다가 극의 끝에 다다라서야 시라노의 죽음과 함께 진실은 가야 할 곳에 닿는다. 진실은 말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러야 내뱉어지거나, 진실로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서야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회사에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고 있었다. 팀 리더와 내가 매 미팅마다 강조하던 게 결국 잘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바다로 가야 할 배가 산에 도달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토록 강조했던 게 왜 상대에게 다다르지 못했을까 곱씹던 차였다. 다시 국립극장에 돌아왔을 때 나는 얼마나 많은 명백한 조언들을 흘리고 지내는지, 분명하게 미련한 사람인지 새로 곱씹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에 마음에 허기가 들자 실제로 배가 고파왔다.

"선미야, 화장실 좀 들렀다 가자."

"응?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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