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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Nov 08. 2017

한 걸음씩 차근차근, 지치지 않는 느린 걸음으로

젠더퀴어이자 팬섹슈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엔진’

젠더퀴어이자 팬섹슈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엔진 님 ⓒ퀴어인컴퍼니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무엇인가요?


퀴어인컴퍼니 인터뷰의 고정 첫 질문이다. 인터뷰 전까진 상대방의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어렴풋이 짐작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레즈비언인 줄 알았는데 바이섹슈얼이고 바이섹슈얼인 줄 알았는데 레즈비언이고 부치인 줄 알았는데 퀘스쳐너이고…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이 엔진 님을 만났을 때 젠더퀴어(Genderqueer,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나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다른 성별정체성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이들을 두루 아울러 가리키는 범주)라는 소개를 듣고 상당히 의외였다. 엔진은 소위 말하는 ‘여성스러운’ 외모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엔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근 몇 년 젠더퀴어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남들이 받아들이는 나의 성별이나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성 역할, 실제로 내가 느끼는 위화감(Gender Dysphoria), 그사이에는 분명 틈이 있어요. 그렇지만 젠더정체성에 관해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지는 않았어요.


그는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나의 젠더는 무엇인가?’ 성별정체성을 분류하는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엔진은 그중에서 여성과 남성, 둘로만 분류되는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Gender binary)을 넘어서는 성 정체성 모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로서 ‘젠더퀴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엔진은 다른 보편적인 한국 가정보다 성 역할의 구분이 흐릿하고 수평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일까. 타인에게 혹은 사회적으로 이른바 ‘여성스러운’ 역할과 모습을 강요당하는 순간이, 한 인간이 아닌 여성으로만 인식되고 대상화되는 게 늘 불편했다.


“대부분 사람은 젠더퀴어의 외모가 ‘중성적’이거나 ‘티가 날 것이다’라고 짐작하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피곤해요. 젠더퀴어라는 용어를 넓은 범주에서 보았을 때, 그 사람의 성별표현(Gender expression, 스스로 드러내는 겉모습을 통해 젠더를 표현하는 방식)은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여성적/남성적’ 모습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혹은 다양한 성별표현이 동시에 그리고 교차하여 나타날 수도 있죠. 사람들이 젠더퀴어에 대해서 이미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젠더퀴어이자 팬섹슈얼(Pansexual, 상대방의 성별정체성에 구분을 두지 않고 정서적,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팬섹슈얼이자 젠더퀴어로 정체화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 두 가지 정체성은 독립적인 개념을 넘어서 상호 의존적으로 융합된 의미를 가져요. 나와 타인의 성별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인지하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별개로 일대일 관계에서 상대방이 나의 ‘이성’인지 혹은 ‘동성’인지, 그 경계와 구분은 모호하고 불필요하게 느껴져요. 젠더퀴어 중에는 안드로진(Androgyne,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니는 정체성),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젠더가 유동적이라고 인식하는 정체성), 에이젠더(Agender, 젠더가 없음을 뜻하는 정체성의 한 종류) 등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 지금의 저는 젠더퀴어라는 용어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고,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엔진이 거의 매일 하고 다니는 세월호 팔찌 ⓒ퀴어인컴퍼니


엔진의 직업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엔진은 교육 활동을 하는 시민사회단체의 전업 활동가이다. 단체가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는 기존의 일방향, 수직적인 교육이 아닌 수평적인 배움을 추구한다.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닌 인권, 평화, 생태 감수성 등을 교육 현장에 녹여내는 것이다.

활동가라고 하면 자원봉사의 개념을 떠올리거나 회사원과는 많이 다를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어떤 부분은 평범한 직장 생활과 같아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일 사무실로 출퇴근하고, 외부 일정이 잡히면 출장을 가요. 작은 단체지만 팀별 직책도 나누어져 있고요. 저의 주 업무는 교육과 관련해서 외부단체와 소통하는 거예요. 학교나 다른 단체들이 어떠한 이유로 교육을 신청하는지 파악하고, 저희 단체가 지향하는 활동 목표와 형태를 안내하며 적절한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의견을 나누죠.

교육 분야에서 일한 지 어느덧 4년 차인 엔진, 사실 그는 전 직장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교육 관련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 이유를 돌이켜보면 경쟁 중심의 한국 교육 안에서 한계와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공공영역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그 마음이 교육이라는 창구로 풀어지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의 활동이 만족스럽다고 한다. 무엇이 가장 좋으냐는 질문에 “동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 힘을 주는 소통을 바탕으로 교육의 변화와 그 의미를 찾아가는 게 즐겁다”며 “한편으론 내가 교육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여전히 순간순간 신기하다”고 웃는 그였다.

동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 힘을 주는 소통을 바탕으로 교육의 변화와 그 의미를 찾아가는 게 즐겁다는 엔진. ⓒ퀴어인컴퍼니


“잠깐만 모여주세요!”…우리 회사 성소수자 나야 나


엔진에게 동료 중에도 성소수자가 있는지 물었다. 엔진은 그렇지 않아도 직장에서 처음 커밍아웃했을 때 누군가 “우리 단체에도 성소수자가 있을 법한데 왜… 없지? 하고 생각했었다”라고 반응해서 재미있었다고 답했다.

엔진이 사내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계기는 2016년 5월 아이다호데이(IDAHOT,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엔진의 단체도 성소수자 인권 연대의 의미로 무지개 깃발 앞에서 사진을 찍는 캠페인에 동참했다.


“사실 입사 후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했어요. ‘시민사회단체이기 이전에 나의 일터인데 내가 커밍아웃해도 앞으로의 직장 생활이 괜찮을까?’ 아이다호데이를 커밍아웃 날짜로 잡아놓고 계속 가슴 졸였어요. 업무를 하다가도 ‘지금 말할까? 이따 점심 먹고 말할까?’ 초조하고, 자꾸 목에 걸려서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결국 퇴근 시간까지 말을 꺼내지 못했고 누군가 퇴근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오늘이 지나면 도저히 말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에 그분을 붙잡고는 “잠깐만 모여주세요!”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동료들이 깜짝 놀랐어요. (웃음) 다수의 인원 앞에서 커밍아웃하는 건 처음이었고, 말을 잇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이 났어요. 처음엔 사람들에게 그나마 익숙한 용어로 전달하기 위해 팬섹슈얼이 아닌 바이섹슈얼이라고 커밍아웃하면서 바이 혐오에 대한 두려움도 털어놓았어요. 나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오롯이 나로 존재하며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동료들도 같이 울면서 저를 꼭 안아줬어요. 커밍아웃은 주워 담거나 되돌릴 수가 없으니 다음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괜히 막막하고 살짝 무섭기도 했어요. 다행히 저의 걱정과는 달리 무섭거나 불편한 순간은 없었고, 감사하게도 그 날 이후로 단체 내 퀴어인권에 대한 공부나 나눔이 더 풍성하고 편안해졌어요. 배움의 공간 어디에나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아무리 활동가라도 일터에서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용기 내 커밍아웃을 한 엔진이 멋있게 다가왔다. 엔진에게 직장에서 커밍아웃하기 전엔 퀴어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과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처음 퀴어 사회를 접한 것은 대학교에서다. 레즈비언 친구를 따라 교내 성소수자 동아리를 찾았다. 처음은 친구를 지지하는 마음으로 동아리를 방문했지만, 곧 청소년기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중학교 때 제가 굉장히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활발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늘 옆에 붙어있었고 항상 챙겨주려고 했죠. 그때는 동성애나 다양한 성적지향과 정체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아, 나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남자가 되고 싶은 걸까? 트랜스젠더인가?’하고 생각했죠.


성소수자 동아리에서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 엔진. 혼자 온라인으로 관련 정보를 검색하고 용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알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엔진은 성소수자 안의 소수자였다.

그때는 동성애나 다양한 성적지향과 정체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아, 나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남자가 되고 싶은 걸까? 트랜스젠더인가?’하고 생각했죠. ⓒ퀴어인컴퍼니

“한때는 왜 나는 동성애자가 아닐까 속상해하기도 했어요.”


“한때는 왜 나는 동성애자가 아닐까 속상해하기도 했어요. 성소수자 인권운동이나 퀴어 커뮤니티는 동성애/동성애자 중심이기도 하고, 흔히 사회가 인식하는 성소수자의 모습 또한 동성애자 위주니까요. 이런 속마음을 처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던 계기가 아까 말한 직장에서의 커밍아웃이에요. 그전까진 이성애자에게도, 동성애자 친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서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거나 두루뭉술하게 ‘나는 성별의 구분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누군가 만날 때 그 사람에게 끌린다’라고만 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인 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성소수자에 대한 인지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이성’과 연애도 하고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이었고, 동성애자 중심의 커뮤니티에서 보기에는 ‘충분히 퀴어스럽지 못한, 차별을 피해갈 수 있는’ 존재였던 거죠. 그러다 보니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없는 걸까. 나는 대체 어디에 속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힘들어했어요.”


2017년 초, 엔진은 직장의 교육지원금으로 퀴어인권 강좌를 듣게 됐다. 7주간의 연속강좌였던 그 수업을 통해 새로운 퀴어 사회를 마주했다. 스무 명 정도가 함께하는 크지 않은 수업이었지만 엔진은 그렇게 많은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한자리에 있는 걸 처음 봤다.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처음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만 해도 저의 정체성에 관해 얘기하거나 고민을 나누는 것에 엄청 소극적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직장 동료와 연인, 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힘으로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커밍아웃할 수 있었고요. 지금은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커밍아웃을 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퀴어 정체성 혹은 관련 이슈가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주변에 적극적으로 말하게 되었어요.


엔진은 이어 자신에게 커밍아웃이 어떤 의미인지도 설명했다. 엔진에게 커밍아웃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끊임없는 소통이다. 우선 팬섹슈얼이나 젠더퀴어라는 용어 자체를 낯설어하는 사람이 아직 많다. 엔진의 경우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정체성에 대해 늘 설명을 덧붙이거나, 증명을 요구받기도 하는 입장이기에 커밍아웃의 피로도가 크고 때로는 위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커밍아웃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엔진은 혹 용어와 언어가 낯설더라도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을 고유한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대방의 정체성이나 어려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편견을 가지거나 어떤 부분을 멋대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반응을 반복해서 마주할 때면 화가 나기도 하고 막막함이 쌓인다고 한다.


“금이 그어져 있는 운동장 코트를 상상해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리가 있는데, 어느 쪽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금을 밟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는 불안감이 저를 오랫동안 힘들게 했어요.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아마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요? 주류의 언어로 자신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 혼자라는 생각에 그동안 지치고 외로웠지만,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같이 고민을 나누면서 함께 걸어갈 길을 찾고 싶어요.”


‘지금은 비록 성소수자 친화적인 시민사회단체에서 차별이나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일하고 있지만, 또 다른 직장과 진로에 대해 생각할 때면 고민이 깊어진다. 시민단체가 아닌 일반 회사에 다니게 된다면 그 생활은 어떻게 다를지,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종종 성소수자 친화적인 외국계 기업이나 다른 나라의 가족구성권 제도에 대한 소식을 접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런 회사를 찾는다는 건 여전히 제한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며 일할 수 있는 직장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우리 사회에도 분명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멈추지 않는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입장에서 때때로 그 속도가 매우 더디게 느껴진다. 한 걸음씩이라도 차근차근 나아갈 수 있도록, 지치지 않는 느린 걸음을 다짐해본다.’

-엔진 님 인터뷰 내용 중 발췌



앞으로의 연재 계획
2017년 초부터 진행해온 퀴어인컴퍼니 인터뷰 프로젝트 시즌1을 이번 엔진님 인터뷰로 마칩니다. 제가 퀴어인컴퍼니를 진행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퀴어인컴퍼니를 위해 기꺼이 인터뷰 섭외에 응해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 발행했기 때문입니다. 당분간 새로운 인터뷰이들을 모집하는 시기를 가지며 퀴어인컴퍼니 인터뷰 프로젝트를 쉬어가겠습니다. 그래도 프로젝트 진행 후기라던가 지난 인터뷰 내용들을 다시 소개하는 등의 활동은 종종 이어갈 예정이니 꾸준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퀴어인컴퍼니 블로그에 귀한 발걸음 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연재된 인터뷰들을 읽어주시고, 인터뷰이로 프로젝트 시즌2에 참가하고 싶으신 퀴어 독자가 계신다면 이메일(queerincompany@gmail.com)이나 QiC 트위터 공식계정(@queerincompany)으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퀴어인컴퍼니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성소수자라면 누구든 두 팔 벌려 대환영입니다. 



퀴어인컴퍼니(Queer in Company, QiC) / 우리 회사에 성소수자가 다닌다

직장인 성소수자 드러내기 프로젝트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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