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패션 기획 MD의 하루

그냥 회사원 말고

by 시경
내 하루는 평범하다. 그래도 오늘 하루 돌아보면 아직 청춘을 이야기하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아침 5시 50분에 일어나 대충 양치질을 한다. 30대가 지나고 내 피부는 소중하므로 물 세수를 해도 빨간 양 볼에 수분크림은 꼼꼼히 발라준다. 아직 자고 있는 남편에게 뽀뽀를 해주고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오늘은 깨지 말고 편히 자게 내버려 두고 어서 아파트 단지 헬스장으로 내려간다. 6시 5분에 헬스장에 도착하면 기지개 한 번 쭉 펴고, 러닝머신 경사 3 속도 6을 세팅한다. 딱 2분. 몸이 풀리든지 말든지 대충 걷다 보면 잠이 조금 깨는 것 같다.


봄기운이 연하게 풍겨오는 4월 첫 주의 창 밖은 아직 푸르스름하다.


어느 방향으로 걷는지도 모르는 비몽사몽 한 2분이 지나면 이제 뛸 시간이다. 속도 9다. 이것도 2분. 첫 세트라 벌써 숨이 차다. 슬슬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지고 속도 6으로 다시 걷다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는다. 그렇게 2분씩 3분씩 5분씩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한다. 30분 동안 열심히 뛰다 보면 땀도 나고 개운해진다. 러닝 머신에서 내려와 이제는 복근 운동이다. 복근 운동 10분.


일주일에 2번 복근 운동을 한다고 뱃살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풀어져 있는 복압을 조금이라도 긴장시키기 위해 운동을 할 때만큼은 최선을 다한다. 그다음 다른 운동도 깔짝 해주다가 스트레칭을 하고, 마지막으로 엉덩이 상태를 체크해 준다. 절망스럽다. 헬스장 돌돌이로 종아리를 한쪽씩 짓이겨주고, 그동안 왜 이 좋은 걸 안 했지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8시 20분 출근을 한다. 잠실에 있는 나의 회사는 스포츠 의류 브랜드로, 내가 하는 일은 의류 기획이다.


MD라는 일인데, 상품이 세상에 나오게 매니징 하는 모든 일을 한다. 이 일을 한 지 어느새 9년이 지났고, 쉼 없이 일했고, 다른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도 여러 번 해보았다.


하는 일의 장르가 패션이지만, 회사에서 돈을 받으며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데 내 일의 목적이 있다 보니

패션이라는 허황에 눈속임당하지 않으면서 또 트렌드는 한 스푼 넣어주는 사업 감각을 몹시 요하는 일이다.


디자인, 마케팅, VMD 같은 브랜드 안에 있는 다른 직무들과 다르게 상품 기획은 ‘기획한 상품‘이 곧 ‘돈‘으로 직접 연결이 되기 때문에 상품이 똑바로 있어야 뭘 하든 돈이 벌린다.


돈이 벌려야 회사는 생존할 수 있다.


9시 반 보다 조금 일찍 출근을 해서 잠시 뉴스레터, 롱블랙, 자기 계발과 같은 개인적인 업무들을 하다가 다시 8시간 동안 본업에 집중한다.


27SS 첫 샘플을 내기 전 발주 계획 수정, 26FW 콜라보레이션 관련 업무 커뮤니케이션을 하다가 머리가 아파지면 잠시 조금 쉬운 업무들을 하면서 머리를 쉬게 해 준다.


20대에는 아침에 10킬로미터를 달리기를 하고 와도 그저 상쾌했는데, 고작 4킬로미터에도 이렇게 힘이 든가 한탄하면서 침침한 눈에 안약을 넣어준다.


오전 3시간이 지나면 점심시간이 된다. 화요일은 팀원 10명과 모두 함께하는 점심으로 메뉴는 쌈밥이었다. 제육은 많이 없는 14,000원 쌈밥 정식이었지만, 따라 나오는 미역국이 푸짐했다. 덕분에 혈당 스파이크 없는 오후를 보낼 수 있었다.


중국에서 콜라보레이션 상품들에 대한 수출 요청이 들어왔다. 중국의 비즈니스는 이해 불가한 이유로 무자비하게 반품을 한다던지 오더는 해놓고 검사는 책임지지 못한다던지 하는 다소 거칠고 난폭한 형태이지만, 스케일 하나만은 크다.


납기가 이미 타이트한 상황이라 전산 결재까지 기다릴 수 없어 엑셀로 정리된 발주서와 프린트한 작지, 보정 코멘트를 합쳐 업체에 던져 버린다. 찰떡 같이 잘해주시는 봉제업체, 원단업체 사장님들은 정말 대단하다. 그들 없이 브랜드는 없다.


중국에서의 히트는 한국에 엄청난 돈 물결을 안겨주기에 과정은 힘들지만, 결과는 인센티브일까 생각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


오늘 하루 중간중간 거슬리는 인간들이 있었지만, 오늘 하루도 잘 참았다! 칭찬해 주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온다.


최근에 중학생의 전기자전거 난폭 운전으로 추돌 사고가 있었던지라 조심조심 운전 중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옆에 차도 껴주면서 엉덩이 따시와 봄 저녁의 찬 공기를 동시에 느껴본다.


한 주에 오고 가는 돈이 100억이 되는 날도 있는데, 물론 다 회삿돈이라 큰 감각이 없다. 내 사업 내 돈 100만 원에는 온몸이 곤두서지만 말이다. 본업을 최대한 오래 하면서 감각을 키워나가는 일이 재밌다.


내가 하는 일을 아름답게 문장으로 만들면 ‘사람들이 편안할 수 있는 옷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 옷이 운동할 때도 입는, 일상생활에서도 입는 편한 그런 옷이라 기본적으로 튼튼하고 겨울엔 따뜻하든 더울 땐 땀이 빨리 마르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만 쫓는 옷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옷이라 스포츠 의류 기획이 재밌다.


“너 이 옷 우리 아빠한테 오빠한테, 아는 요가 선생님한테 선물할 수 있어?”


그런 질문들을 거듭해서 상품의 존속을 가려낸다. 브랜딩에 대한 공부도 하고, 다른 부서들과 협업할 수 있는 센스도, 바쁜 내 할 일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여유도 필요하다.


재미가 있다. 회사 안에는 같이 있는 것도 싫은 사람들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다. 화가 나고 답답하다 싶으면 그들에게 가서 괜히 시비도 한 번 걸어보고, 울상도 짓다 보면 기분이 풀릴 때가 많다.


옷을 다루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감각도 좋은 편이라 생각한다. 일을 하면서 만난 위트 있는 사람들이 좋다. 그들과 만들어내는 사업의 흥망성쇠가 지나갔고, 또 펼쳐져 있다.


그냥 회사원 아니고 패션 기획 MD여서 이만하면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