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7~40] 이르쿠츠크 발 - 카잔 행 횡단열차
2018-05-16 ~2018-05-19의 기록
2018-05-16, 11:58 PM (이르쿠츠크 시간)
우여곡절 끝에 열차에 탑승했다.
이번 열차는 탑승 부터 쉽지 않았다. 탑승 시간보다 30분 정도 이른 시간에 플랫폼에 도착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기차 하나가 플랫폼에 도착했다. 안내 전광판에는 내가 타는 기차의 번호인 081번이 이 플랫폼에 선다고 되어있었으나 내 눈 앞에 보이는 기차에는 092번이 적혀있었다. 그래서 이 기차가 아닌줄 알고 계속 기다렸는데 앞에 서있는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이 기차가 우리가 타야할 기차가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가 타야하는 칸을 찾으러 갔다. 5번 칸이었는데, 기차에는 칸 번호조차 써있지 않았고 앞에서부터 다섯 번째로 있는 것이 5번 칸인 것도 아니었다. 한 역무원이 저쪽으로 가라그래서 갔는데 그곳의 역무원에게 물으니 다시 반대쪽으로 가라고 했다. 알고보니 우리 칸은 딱 그 두 역무원의 사이에 있는 칸이었는데, 그곳의 입구에는 역무원이 아무도 서있지 않아서 우리가 입구인줄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었다. 반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우리를 보고는 처음 만났던 역무원이 엄청 큰 소리로 우리 칸의 역무원을 밖으로 불러내 주셨다. 덕분에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울란바토르에서 이르쿠츠크 올 때에는 열차에 다 써있어서 편하게 탔었는데.
2018-05-17, 12:10 AM (이르쿠츠크 시간)
열차가 출발했다. 우리 앞에는 엄청 뚱뚱한 백인 남자가 침대를 놔두고 굳이 앉아서 책상에 고개를 쳐박고 자고 있다. 술을 마신 걸까? 이상한 사람일까? 그 책상은 앞 침대 사용자인 우리와 공유해야 하는 책상인데 이 분이 엎드려 자는 바람에 우리는 아직 접근할 수 없다.
앞에 덩치 큰 남자가 있으니 내가 2층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침대 위에 올라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 사다리도 제대로 된게 없어서 힘을 잘 써서 올라가야 하는데 각도가 잘 안 나온다. 매트리스 위에 제공된 침대 시트를 깔고 베개에 커버를 씌우고 누웠다. 올라오고 보니 2층이 너무 좁아서 내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작은데 그에게는 얼마나 작은 공간이었을지. 발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간다.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벽에 대고 글을 적고 있으니 그가 와서 후레쉬를 켜서 줬다.
2018-05-17, 08:30 AM (이르쿠츠크 시간)
자고 일어났다. 새벽에 엄청 많이 깼다. 다른 사람들이 새로 열차에 타는 소리가 계속 나서 아주 여러번 깼다. 앞 침대 쓰는 아저씨가 깨서 뒤늦게 침대 시트를 깔고는 이불을 찾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이불이 있는 곳을 가리켜 알려주었다. 그는 나에게 손으로 '따봉' 표시를 해보였고, 나도 같이 따봉 하며 크게 웃어보였다.
일어나니 배가 고프다.
2018-05-17, 08:45 AM (이르쿠츠크 시간)
앞에 아저씨가 너무 짜증난다. 계속 담배 냄새 풀풀 풍기면서 들어오고 고개도 안 돌리고 기침한다. 그것도 아주 깊은 기침으로 자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발냄새가 정말 심각하게 심하다.
1층에 내려가면 그 아저씨랑 너무 가깝게 있게 돼서 내려가고 싶지가 않다. 밥을 먹으려면 밑으로 내려가서 그 아저씨랑 공유하고 있는 책상을 사용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정차해 있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GPS가 잘 안 된다.
2018-05-17, 11:45 AM (이르쿠츠크 시간)
비어있는 옆 테이블에서 오빠랑 카드 게임을 했다. 도둑 잡기로 시작해서 훌라, 원카드, 더하기 빼기 게임 등 다양하게 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아저씨 승객들과 떠드느라 시끄럽던 우리 앞 침대 아저씨는 9시 반 부터인가, 계속 잔다. 시끄럽게 굴 때 보다는 훨씬 나은데 발냄새가 너무 심하다.
옆에 다른 구역들 보면 여섯 명 타는 곳인데 한 명만 있는 곳도 많고 2층 침대는 거의 다 비어있는데 1층 침대 두 개를 예약할 걸 그랬나보다. ㅠㅠ 담배 냄새 + 아무 데나 기침 + 발냄새 쓰리 콤보 아저씨 때문에 시베리아횡단열차에 대한 기억이 안 좋아질 것 같다. 옆 침대가 비어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ㅠㅠ 아침으로는 9시 반? 10시 쯤에 컵라면 두 개랑 계란 두 개 오빠랑 나눠먹었다.
이 아저씨 계속 이렇게 잠만 잤으면 좋겠다.
2018-05-17, 07:20 PM (이르쿠츠크 시간)
지금 Krasnoyarsk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엄청 많이 타서 우리 구역, 양 옆 구역의 통로 침대 (우리가 앞 침대 아저씨 피해서 종종 있던 곳) 까지 다 꽉찼다. 우리의 대피소가 없어졌다. ㅜㅜ
쓰리 콤보 아저씨는 계속 자다가 일어나서 우리 구역 통로 쪽 침대 쓰는 아저씨한테 라면 셔틀 시키고는 본인은 줄담배 피고 들어왔다. 분명 러시아어 못 한다고 말했는데 계속 러시아어로 우리에게 뭐라고 말한다. 못 알아듣는다는 사인을 계속 보내도 끊임 없이 이야기하기에 언젠가부터는 그냥 귓등으로 흘렸다.
우리 구역 여섯 명 중 나 빼고 다섯 명, 그리고 양 옆 구역의 통로 침대들 까지, 즉 내가 내 침대에 누워서 볼 수 있는 모든 침대가 전부 남자들이었다. 게다가 다들 덩치도 어찌나 그렇게 큰지. 이렇게 자리가 다 차고 나니 오빠랑 나랑 1, 2층으로 하길 잘 한 것 같다.
쓰리 콤보 위에 있는 이층 침대 걸린 남자는 자꾸 쓰리 콤보 옆에 안 앉고 우리 침대에 앉는다. 그도 열차에 들어와서 쓰리 콤보를 보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며 'Oh God.' 한 걸 보니 우리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으악. 이대로 카잔까지 가려나... 아직 1/5도 안 왔다는게 소름이다.
2018-05-17, 08:30 PM (이르쿠츠크 시간) / 07:30 PM (현지 시간)
얼른 저 아저씨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죽겠다. 열차 안에서는 담배 피면 안 된다고 안내문 붙어있는데, 러시아어 못 읽는 나도 그 사인은 알아보겠던데,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담배를 피고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내리거나 우리가 카잔에 도착하는 순간 정말 해방된 느낌일 것 같다.
할 일이 너무 없다. 이층 침대에서는 앉을 수도 없어 계속 천장만 보고 누워있다. 새 e-book이라도 다운 받고 싶다. 데미안을 반 조금 넘게 읽었는데 살짝 지루해져서 1100words를 켜서 영어 단어를 외우기도 했다가 지금은 '사이드트랙'을 읽는 중이다.
하필 오늘 커피가 먹고 싶었던 바람에 세 잔이나 마셔서 잠도 못 자고 있다. 좀 자고 싶은데.
2018-05-17, 10:45 PM (이르쿠츠크 시간)
앞 침대 아저씨가 경찰로 보이는 사람 두 명에게 불려갔다. 여권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여권을 보여주더니 따라오라고 했는지 같이 어디론가 갔다. 담배 펴서 그런 걸까? 마약을 했나? 경찰들이 뭐라고 하는 건지 궁금하다.
2018-05-18, 10:00 AM (이르쿠츠크 시간)
어제는 몇 시쯤 잠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오빠 말로는 11시 반 쯤인 것 같다고 했다. 커피 기운으로 하루 종일 잠들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확 잠든 모양이다. 새벽에 앞 침대 이층 청년이 나가고 오늘 낮에 다른 청년이 들어와 차지했다.
오빠가 말해주었는데, 새벽에 경찰이 우리 칸에 몇 번 왔다갔다 하더니, 어떤 아저씨 한 명이 손을 뒤로 하고 수갑이 채워진 채 열차 밖으로 끌려나갔다고 했다. 아마 새벽에 탄 사람인 것 같은데 소리를 지르고 이상한 행동을 보여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자느라고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2018-05-18, 03:00 PM (이르쿠츠크 시간)
아침에 한국인 언니랑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통로 쪽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쉬고 있을 때 언니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나는 언니랑 조금 더 이야기하러 언니 침대 쪽으로 갔다. 오빠는 처음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에 있어서는 나보다 낯을 더 많이 가리는 것 같다.
언니 침대가 있는 구역에는 여섯 침대 중 언니 혼자만 있었다. 엄청 부러웠다. 우리는 칸에서 가장 가운데에 있는 구역이었는데, 언니가 말해주기를 가운데 쪽 자리가 가장 먼저 찬다고 했다. 문과 멀어서 그런지 외풍도 적고 따뜻해서 가운데 쪽 자리가 가장 인기가 많아 우리 구역이 사람이 많은 거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좀 따뜻한 것 같긴 했다.
02:20 PM (이르쿠츠크 시간) 쯤에 언니랑 식당 칸에 다녀와봤다. 많이 비싼 편이라고는 하는데 한 번 먹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하여 같이 갔다. 음식 맛은 괜찮았는데 엄청 비쌌다. 딱 한 접시에 치킨 조금과 감자 조금 나왔는데 555루블이었다(약 10,000원). 언니는 보르쉬라는 메뉴를 먹었는데 부대찌개 맛 나고 아주 맛있었다.
2018-05-18, 10:05 PM (이르쿠츠크 시간) / 07:05 PM (현지 시간)
방금 빵셔틀 아저씨가 커피믹스 하나 줘서 먹어 봤는데 설탕물에 커피 향 첨가한 맛이다.
쓰리콤보 아저씨는 정말 하루 24시간 중에 22시간 정도는 자는 것 같다. 깨어있는 2시간은 담배피거나, 식당 칸 가서 술마시다가 온다.
'사이드트랙'은 300페이지 넘게 읽었다.
계속 서쪽으로 달리다보니 시간이 계속 한 시간씩 앞으로 간다. 낮을 향해 달리고, 과거를 향해 달리는 기차다. 시간을 벌고 있는 느낌이다. 하루가 길다.
2018-05-19, 11: 55 AM (이르쿠츠크 시간) / 07:55 AM (현지 시간)
새벽에 오빠가 깨워서 앞 침대 쓰리 콤보 아저씨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내렸다고 말해줬다. 정말 너무너무 기뻤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근한 아줌마가 그 침대에 대신 누워있었다. 아줌마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영어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이 기차 안에서 처음 봐서 정말 반가웠다.
아침으로는 도시락 라면 스파게티맛을 먹었는데 그냥 덜 매운 라면이었다. 도시락은 빨간색 맛이 제일 맛있다.
다 먹고 화장실 가려는데 내가 딱 들어가려는 순간 옆 구역 스도쿠 아저씨가 먼저 들어갔다. 문 앞에서 한 30분을 기다렸다. 나는 살짝 컨디션도 안 좋고 소변도 마렵고 변비 증상도 있어서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웠다. 너무 힘든데도 계속 마음을 가다듬으며 급한가보지, 똥이 많이 안 나오나보지, 좀 오래 걸리나보지, 하면서 힘들게 서서 기다렸는데, 30분이 지나고 아저씨가 딱 문 열고 나오는데 향수 냄새가 빡 풍기며 머리도 엄청 곱게 단장하시고는 커다란 빗과 향수를 들고 나오시는 거다.
정말 너어어어무 짜증이 났다. 화장실 수요가 가장 높은 이 귀한 아침 시간에!!!!!!!! 이렇게 많은 승객들이 같이 쓰는 딱 두 개 밖에 없는 화장실인데!!!!!????!!??? 이래도 되는 거?!??!??
2018-05-19, 06:50 PM (이르쿠츠크 시간) / 02:50 PM (현지 시간)
이제 카잔 까지 두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아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렇다.
시베리아횡단열차가 느림의 상징인 건 다름이 아니라 실제로 느리게 달려서 그런 거 였다. 평균 속도가 70~80km/h 정도 되는 것 같다. 한국에서 기차라고는 KTX와 SRT 밖에 안 타본 나는 이 속도가 신기했다. 옆에 있는 풍경들이 너무 급하지 않게 지나간다.
가장 길었던 기차 여정이 끝나가는 지금, 가장 아쉬운 건 사람들이다.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그대신 책을 많이 읽었다. '데미안'을 반 조금 넘게 읽었고, 800페이지 짜리 '사이드트랙'을 다 읽었다. 밖의 풍경을 보며 갈 수 있는 것,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는 것은 참 좋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양하게 섞인 땀냄새들과 앞 침대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가 내리고 나니 횡단열차는 이렇게 좋은 거였는데. 아저씨 내리고 이제 막 횡단열차가 편안하고 좋아질 때쯤 되니 내려야 하는 게 아쉽다. 이대로라면 며칠 더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횡단열차도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느냐가 정말 중요하다.
2018-05-19, 09:00 PM (이르쿠츠크 시간) / 04:00 PM (현지 시간)
카잔에 내렸다.
내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분명 카잔인데 역 이름이 카잔이 아니다. 기차 시간표에 카잔이라고 써있는데 그곳에는 정차 시간이 적혀있지 않다. 역무원에게 묻고, 주변 승객들에게 묻고, 아주 여러번 확인을 받고 나서야 Vosstanie Pass 라고 된 곳에서 내리는 게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그것도 확실치 않았다. 내리고 나서도 불안했는데 역 밖으로 나가서 GPS를 잡고 숙소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을 찾고 난 이후에야 마음이 놓였다.
편하기보다는 고생스러운 여정이지만
횡단열차는 분명 매력적인 여행이다.
이르쿠츠크에서 다섯 시간이 느린 도시에 왔는데
2박 3일 간 천천히 달려왔기에 시차적응이 따로 필요 없다.
왠지는 몰라도 분명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이 열차를 타러 이곳에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2018.05.19.
세계여행 Day 3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