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5] 러시아 모스크바 /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붉은 광장
옷을 챙겨 입으며 날씨를 확인하니 오늘은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나는 가방 안에 딱 한 장 있는 예쁜 옷을 꺼내 입었다. 이걸 입으면 괜히 꾸민 것 같고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깊숙히 넣어두었던 빨간색 립밤도 괜히 꺼내 한 번 발라보았다.
예쁜 곳에서 밥
그제와 어제, 숙소에 들어가던 길에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했던 레스토랑이 있었다. 오늘 아침 가방을 챙겨 길을 나서며 남편이 거기서 아침을 먹자고 했다.
"오! 진짜로?! 끄으래!!! 좋아!!!!"
늘 비용을 아끼는 것을 생각해야하는 상황이라 분위기있는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에이, 돈 아껴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냥 포기해버린다. 그렇기에 그가 먼저 이렇게 예쁜 곳에서 식사하자고 제안해주면 나는 너무나 고맙고 기쁘다. 남편은 거의 항상 어디서 먹어도 크게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에 이런 곳에서 식사하자고 제안했다면 그건 순전히 날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는 뜻인 걸 알기 때문이다.
굼 아이스크림
아침 식사를 하고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어제와 그제 저녁에 들어갈 때에는 없었던 보안관들이 광장 입구에서 가방과 소지품을 검사했다.
일단 굼 백화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어제 저녁 붉은 광장 투어를 할 때 가이드가 굼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하는 거라고 해서 먹어보았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 아이스크림은 정통 소련식 레시피라고 한다. 러시아인들에게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라 하여, 굼에 다녀오고도 이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면 다녀온 게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지인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어제는 바닐라와 스트라차텔라, 오늘은 블루베리와 체리맛을 하나씩 입에 넣고는 광장으로 나왔다. *1)
레닌 없는 레닌의 몸
어제 투어해 준 가이드가 오전 10시 부터 오후 1시 사이에 방문하면 레닌 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오늘 들어가보려고 했다. 들어가면 실제 레닌의 죽은 몸이 거의 살아있는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북한에서 와서 레닌을 그대로 보존시킨 이 레시피(?, 그 가이드 친구가 이렇게 표현했었다)를 얻어갔다고 한다. 북한 어딘가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이렇게 보존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혼이 빠져나간 몸을, 나의 죽어있는 몸을 꼭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서 수십 년이 지나도록 후대의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자가 원하는 바일까? 혹여 죽기 전에는 원했다 하더라도 몸을 벗어버린 후에 영만 남은 레닌도 원하는 바일까? 레닌이 없어진 레닌의 몸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들이 앞에서 막고 있었다. 오늘은 레닌의 묘에 들어갈 수 없는 날인 것 같았다. 내일 다시 와보자 하고 크렘린 궁 안으로 들어가보려 했는데 그곳도 막혀있었다. 안내 문구를 보니 ‘목요일 휴관’이라고 써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날이 아닌 가보다. 결국 계획했던 레닌 묘와 크렘린을 모두 가지 못했다. *2)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이렇게 예쁜 모스크바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그런 날이었다. 계획은 수정하면 되고 더 좋은 것들로 하루를 채우면 될 일이었다.
꿈꾸는 것 같아
그저께 푸시킨 미술관을 가는 길에 본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내부가 그렇게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만난 가이드 친구도 시간이 되면 이 성당 안을 꼭 들어가보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러시아정교 성당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구세주 성당 내부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3)
성당 안은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웠다. 내부를 다 본 후에는 전망대 위로 올라가는 티켓을 끊었다. 성당 위에는 전망대가 있었는데, 이 성당을 기준으로 360도 각도의 풍경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의 수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성당 위에 올라와 모스크바 시내를 사방으로 내려다보며 우리는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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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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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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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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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래. 매일매일이 그냥 너랑 데이트 하러 나온 것 같은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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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리고 나는 뭔가,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것, 내가 꿈꿨던 바로 그 순간의 중간에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우리가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는 걸 구체화하기 시작한 게 2015년 말 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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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에이, 말도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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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이지! 우리가 같이 은행에 적금 들러 갔던 때가 2016년 1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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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게 벌써 그렇게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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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그래서 2015년 말부터 꿈꿔온 거, 막연하게, 세계여행 해야지! 긴 여행을 해봐야지! 했던 거를 실제로 하게 됐다는 게 너무 신기해. 그냥 시간만 흘렀을 뿐인데 지금 내가 여기 있네. 그 시간이 흘러오는 동안 이 여행하겠다고 분명히 이래저래 분주하고 바빴었는데 그런 건 기억이 하나도 안나고, 오랫동안 꿈꿔온 것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야. 유럽 배낭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했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바라왔던 무언가, 그 꿈 안에 지금 내가 있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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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나도 진짜 안 믿긴다. 아마 2년 다 지나서 이 여행이 끝나도 안 믿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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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 같아 진짜. 여행 다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살다보면 우리가 진짜 세계여행을 갔다왔다고? 할 거 같아. 사진들 보면서 우리가 진짜 이 모든 나라들을 가본 거야? 이럴걸? 꿈꾼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
온갖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온다. 더불어 온갖 춤사위가 몸에서 흘러나온다. 가만히 걸어가지 못하고 팡팡 점프를 해대고 빙글빙글 돌아댄다. 사람들의 시선이 보이지 않고 그저 이 순간과 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행동과 감정이 제어가 되지 않을 만큼 기쁠 때, 그리고 어떤 절제되지 않은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주고 오히려 내가 이렇게 이상해질 때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알기에 함께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뻐해주는 남편이 옆에 있을 때, 나는 이렇다.
티 없이 맑은 하늘보다 더 예쁜, 하얀 구름이 떠다니던 하늘이었다. 나는 몸에 날씨 감지기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흐린 날은 하루 종일 몸의 모든 근육들이 반쯤 자고 있는 느낌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고 기분도 우울한 반면에 오늘 같이 날씨 예쁜 날은 마치 소량의 마약 비슷한 것이 주입된 듯이 세상이 다 내 거 같고 행복하고 그렇다.
오늘의 나는 그랬다.
나는 오늘 모스크바에 있었다.
2018.05.24.
세계여행 Day 45
*
1) 굼 백화점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은 개당 50루블이다. 바닐라와 스트라차텔라(바닐라에 초코칩)가 베리 맛들 보다 훨씬 맛있다. 총 다섯 가지 맛을 먹어보았는데 내 입맛에는 스트라차텔라가, 남편 입맛에는 바닐라가 가장 맛있었다.
2) 레닌 묘는 오전 10시 부터 오후 1시 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월, 금 휴관이라고 한다. 우리가 찾아간 목요일에는 내부 행사가 있어서인지 닫혀있었고, 다음날도 금요일이라 결국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방문하지 못했다.
3)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 입장하는 것은 무료이다. 그러나 전망대 위에 올라가는 것은 인당 350루블을 지불하고 표를 구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