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다가 갬

[Day 43]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 야경

by 시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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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렸다. 비가 올 듯 하면서 우중충하기만 했다. 나는 거의 언제나, 흐린 날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빛을 잃은 사물들을 바라보면 우울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기분이 별로이면 거의 그도 그랬다. 그래서였는지 어째서였는지 우리는 말다툼을 했다. 이즈말롭스키 시장에 갔고, 사고 싶었던 예쁜 필름카메라를 샀고,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이번 일은 쉽게 몇 마디 언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짧은 다툼 후에 나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내 머릿속에 모든 것들이 다 엉켜있었고, 나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디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날카로워졌는지 정리가 필요했던 거다.


말은 없어지고 표정만 심각해진 나의 모습에 불안해하는 그가 느껴졌다. 계속 눈을 피하고 쳐다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는 거의 내 말을 들어주는 쪽인데 오늘은 자기가 좀 말을 많이 했다 싶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그에게 불평도 불만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는데 어쩌다 한 번 이렇게 한 마디 해놓고 어쩔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에 괜시리 미안해졌다. 우리가 싸웠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내가 기분 나빴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며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런 그의 모습에 왜 싸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기 시작했다.


지하철 안에서, 이곳은 시끄러워서 이야기하기 싫다고 하는 나에게 그는 내 입 바로 앞으로 귀를 가져다대며 검지손가락으로 귀를 톡톡 두드렸다. 내 마음에 무슨 소용돌이가 치고 있기에 내 표정이 이렇게 어두운 건지, 지금 당장 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이 느껴졌다. 얼른 다시 좋은 감정을 나누자고 맘졸여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지금 이 모습처럼, 관계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먼저 엎드리는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의 감정이 틀어졌던 그 일은 분명 이 마음보다 훨씬 작은 것이었을 거다.



우리의 다툼은 항상 나의 '웃어버림'과 함께 끝이 난다. 생각이 정리가 되고 상황이 이해가 되고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 내 안에서 문제는 다 끝이 난다. 그런데 앞에 상대방이 있고, 우리는 분명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에 갑자기 '나 이제 다 됐어. 끝~'하기가 좀 그런 거다. 그래서 내 심각한 표정은 내 안에서 문제가 종식되고 나서도 한동안 더 이어진다. 한동안이라봐야 한 1~2분, 오래 가지는 못한다.


갑자기 앞에서 무표정으로 있는 그의 얼굴이 웃기다. 표정 없는 얼굴, 차가운 '척'하고 있는 얼굴이 참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지금 저런 얼굴이라는 거야?'하는 생각과 함께 참을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며 피식, 하고 웃음이 터져버린다. 그러면 그의 한쪽 입꼬리도 하는 수 없이 올라간다. 그러면 다른 쪽 입꼬리까지 올라가며 활짝 웃어버리는 건 시간 문제다. 그렇게 우리의 갈등은 늘 빵, 터지며 끝이 난다.


이번에도 딱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빵, 터져버렸고 그는 웃는 내 모습에 안도의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직은 어설픈 웃음들을 웃으며 아까의 날카로웠던 우리를 반성했다. 역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며, 물 한 번 베었네, 그지~? 했다.


P1100416.JPG 다시 맑아진 하늘은 이렇게나 예뻤다.

숙소에 들어가서 잠깐 쉬고 다시 나오니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아져있었다. 기분 푸니까 이렇게 좋지 않냐며, 하늘이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푸시킨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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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싸우고 나온 사람들 맞음? (푸시킨 미술관은 플래시 없이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좋아진 기분으로 푸시킨 미술관 구관을 둘러보았다. 재밌는 표정의 그림들과 조각상들을 따라하며 놀았더니 미술관 구경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근처에 쇼핑몰이 있다기에 쇼핑몰도 가보고, 그 앞 광장에서 시원한 분수도 보고 저녁도 먹었다. 그러다가 불 켜진 붉은 광장에까지 닿았다.





붉은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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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한참을 입을 벌린채 쳐다보았다. 한 발 한 발 떼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나를 맞이했다.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고 머릿 속 가득 눈물 같은 것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붉은 광장을 처음 만난 것이 밤이라 더 좋다고 생각했다. 까만 밤에 불 켜진 붉은 광장이 너무 잘 어울렸다. 황홀하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눈은 풀어져 촉촉해졌고 소름이 돋고 심장이 뛰었다. 가장 밝은 밤을 보여주시려고 낮이 어두웠나보다 싶었다.





이 황홀한 순간에 당신이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가장 행복해하는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마 내일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018.05.22.

세계여행 Day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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