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7]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세나야 광장
오늘은 각자의 시간을 조금 보내기로 했다. 하루 정도 가만히 앉아서 글 쓸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남편은 그러라고 하며, 그럼 자기는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미리 가서 탐방을 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이 워낙 방대하고 작품들도 많아서 나와 함께 갈 때 좀 더 효율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미리 가서 봐두겠다고 했다. 나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훨씬 더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기대해왔던 에르미타쥬 미술관을 두 번이나 가볼 수 있고, 나는 글을 쓸만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아침 6시 반에 상트에 도착한 우리는 호스텔에 짐을 놔두고 같이 카페에 있다가 10시가 되기 조금 전에 작별했다. 나는 카페에 남았고 그는 나에게 현금을 조금 쥐여주고는 길을 나서서 미술관으로 향했다.
혼자, 글
이렇게 혼자 앉아 글을 써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물론 그는 함께 있을 때에도 혼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라 옆에 있다고 해서 글 쓰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다. 아마 그는 내가 글을 쓸 때에 옆에 있어도 되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혼자 있는 것은 또 달랐다. 그가 함께 있을 때에는 들지 않았던 생각들이 막 떠올랐다. 그와의 관계 안에 존재하다가 한 발 멀리 떨어져 한 개인으로서의 내 모습을 바라보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컨텐츠에 대하여,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하여, 나의 삶에 대하여 고민해보게 되었다.
내 존재에 대한 고민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는 이 여행만 바라보느라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는지, 나는 왜 글을 쓰고 있는지 말이다. 언제나 주기적으로 방향성을 점검하며 가던 나였는데 그저 여행만 생각하느라 잠시 내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그런 생각들을 하고 나니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생각이 피어오를 때 늘 그렇듯, 가장 아무 것도 아닌 종이와 가장 막 쓰기 편한 펜을 들고는 아무렇게나 종이 위에 쓰기 시작했다. 일단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적어 보는 거다. 그러고 나면 그것들이 실로 연결이 될 때도 있고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재밌는 생각들이 많이 들어서 원래 쓰려고 했던 글은 많이 쓰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필요했던 시간, 재충전의 시간이 되었다.
쇼핑
혼자 하면 더 좋은 것을 하나 더 했다. 바로 쇼핑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그가 있어도 물론 편하게 할 수 있지만 입어보는 옷의 개수가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눈치가 보인다. 그는 늘 괜찮다고 말해주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피곤해보이지는 않는지,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이제 그만 여길 벗어나 다른 곳을 가고 싶어하지는 않는지 신경쓰게 된다.
나는 바지를 하나 사려고 했었다. 원래 입던 베이지색 긴 바지는 앞으로 계속 입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 그 바지를 버리고 새 바지를 하나 구입하려고 했다. 내 하체는 바지를 쉽게 살 수 있는 체형이 아니라 언제나 나에게 바지 사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분명 아주 여러번 입어보는 일이 발생할 텐데, 그러고도 구매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이럴 때에는 혼자 가서 마음 편히 이곳 저곳 두세 번씩 들락거리며 입어보는 편이 훨씬 좋다.
카페에서 지도 검색을 해보니 근처에 '쇼핑몰'이라고 된 곳이 있었다. 눌러서 사진들을 보니 바지를 살만한 곳이 좀 있을 것 같은 꽤 큰 몰인 것 같았다. 카페 내에 담배 냄새가 너무 심하게 퍼져서 더 이상 있기 힘들어질 때쯤, 짐을 챙겨 길을 나섰다.
모험
쇼핑몰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여행을 시작한지 한 달이 넘었지만 낯선 곳의 낯선 길을 혼자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고 그들도 나를 구경했다. 그냥 쇼핑몰을 찾아가고 있는 것인데도 괜히 쫄깃쫄깃하고 큰 모험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쇼핑몰을 찾았다. 그 건물을 찾음과 동시에 나는 더욱 재밌는 것을 찾았다. 그 쇼핑몰 주변이 전부 시장이었던 것이다. 다양한 옷, 가방, 모자들을 팔고 있는 시장이었다. 일단 쇼핑몰 건물 안에 들어가서 바지 살만한 곳들을 둘러보고 난 후 시장을 구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내가 바지를 사기에 딱인 곳이었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은 다양한 브랜드가 입점되어 있었고 피팅 룸도 많이 있어 옷을 입어보기도 편했다. 나는 1층 부터 3층 까지의 모든 매장들을 스캔하고 그 중 두 군데에서 바지 몇 벌을 입어보았다. 적절한 가격에 마음에 드는 청바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딸기
바지를 사고 기쁜 마음으로 밖에 나와 시장을 둘러보았다. 쇼핑몰이 있는 쪽이 시장 입구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훨씬 넓고 큰 시장이었다. 안쪽에는 과일과 채소를 정말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에게 뭘 사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이따가 남편과 함께 와서 사도 되지만 뭔가 선물처럼 들고 가고 싶었다. 남편이 아침에 신던 양말이 너무 오래돼서 하나 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나 양말들을 둘러보았다. 슬프게도 딱 느낌이 오는 양말이 없었다. 너무 얇거나, 너무 목이 길거나, 너무 목이 짧거나, 색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300mm인 그의 발에 들어가기에 너무 작아보였다.
과일을 사 가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과일 코너를 세 바퀴 정도 돌며 가격과 신선도를 체크해서 딸기를 1kg어치 구매했다. (70루블, 약 1,250원)
늦은 점심
점심을 먹지 않은 채로 두 시 반이 되었다. 카페에 들어가 뭔가를 먹고 글을 쓰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문을 하고 와이파이를 연결하니 그에게 딱 6분 전 쯤 카톡이 도착해있었다. 나는 얼른 내가 있는 곳의 주소를 보냈는데 그는 그새 와이파이 환경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주소를 복사해 문자로 보내니 15~20분 뒤쯤 그에게 보이스톡이 왔다. 이제 미술관에서 나와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고 있으니 다 먹고 좀 쉬다가 내가 있는 카페로 오겠다고 그는 말했다.
메뉴판에서 가장 저렴했던 햄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그가 오면 조금 먹어보라고 남겨놓을까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먹었다. 한 입 씩 베어무는 사이사이에 글을 썼다.
재회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오른손을 뒤로 숨긴 채 슬금슬금 들어왔고, 나는 그 이유를 단 번에 알아채고 말았다.
꽃이었다. 그가 꽃을 사온 거였다.
모스크바 역 앞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분들을 보며 '오빠, 나도 여행하면서 꽃 한 번 사주라' 했었다. 그걸 그가 기억하고 있다가 혼자 돌아다닐 수 있었던 오늘, 사가지고는 나타난 거다.
혹시 오늘이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는 그가 상트에 도착하자마자 돌연 '우리 예인이 꽃 한 번 사줘야지!'했었기 때문이다.
알고 받아도 좋았다. 내가 원했던 걸 잊지 않고 기회를 놓치지 않아주어서 고마웠다. 그가 이 타지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꽃집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돌아다녔을 모습이 떠올라 맘이 아릿해졌다. 유달리 웨이터들이 많은 러시아의 카페에서 쑥쓰러운 표정으로 꽃을 들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딸기와 꽃다발
그를 위해 딸기를 사가고 싶었던 나의 마음, 나를 위해 꽃다발을 사왔던 그의 마음은 서로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나누지 못했을 마음들이었다.
연애할 때부터 우리는 말했었다. 같이 있어도 편하고 따로 있어도 편해서 참 좋다고. 이는 믿음과 존중이 있을 때 가능하다. 생각보다 따로 있는 것을 잘 못하는 관계들이 많다. 불안해하고, 조급해하고, 상대를 괴롭힌다. 우리 역시 그런 관계를 경험했던 적이 있었고, 그 경험을 통해 상대방을 온전히 신뢰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존중해주는 서로가 좋았다. 부부는 하나라고 하지만 명백하게는 같이 살기 위해 끊임 없이 협력하고 노력하는 두 명의 개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머지 않아 다시 당신을 만난다는 것이 확실하기에, 나의 혼자 있는 시간은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 만큼이나 완벽했다.
카페에서 나왔다.
함께 길을 나서 내가 발견한 시장에 갔다.
같이 과일을 고르고 양말을 골랐다.
그리고 오늘 내가 했던 생각들을 나누었다.
그는 자기 일처럼 설레하며 함께 나의 앞날을 고민해주었다.
2018.05.26.
세계여행 Day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