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력서의 내가 낯선 이유
우리는 언제부터 공부를 시작했을까. 출생 후 첫걸음마를 떼고 더듬더듬 말을 할 때부터? 사칙연산을 배울 때부터? 저마다 떠올리는 장면은 다르겠지만, 살면서 배움을 얻는 순간은 무수히 많았고 항상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사회통념상 인정되는 공부만을 '진짜 공부'라고 여겼다. 뭐 하나를 해도 인증을 받아야 속이 편했고, 그게 어려우면 배움을 망설였다. 시간, 돈, 노력을 투자하는 일에 기회비용을 끊임없이 셈하며 지레 겁먹었다. 꽤 오랫동안 나의 가치를 수치로, 인증서로 증명하기 위한 공부를 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돼 가고 있음을 느꼈다.
하루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고 환멸을 느낀 적이 있다. 등급, 점수로 종합한 나의 경쟁력. 어색한 수식어와 성과로 장식한 이야기. 어느 하나 마음에 차는 구석이 없었다. 부족한 점만 쏙쏙 골라 돋보기를 들이댄 듯 선명하게 보였다. 숫자, 글, 다시 숫자. 그렇게 채운 서류를 보면서 든 생각. '이 중에 진짜 원해서 한 게 얼마나 되지'. 나는 내가 초ㆍ중ㆍ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어떤 공부를 해왔는지 낱낱이 분해해보고 싶었다.
“공부도 때가 있다” 살면서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때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늦둥이를 둔 어머니는 학구열이 강했다. 딸을 직접 가르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초등학교 시절 내내 미술, 바둑, 피아노 등 다양한 학원을 동시에 다니며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잘하는 꼬마였다. 특히 교내외 그림 대회에서 연달아 상을 받으니 진로는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미술.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만큼 성과를 거뒀다. 공부를 잘하면 부모님이 웃는다. 공식과도 같았다. 그 시절 나에게 공부란 '부모님을 기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예중, 예고, 미대 입학을 준비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그런데 웬걸, 아버지의 사업은 2008년 금융위기로 적신호가 켜졌고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나는 이전까지 수동적인 공부를 해왔던 터라 학업에 공백이 생겼다. 우리 가족 중 나의 성적에 연연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 철이 없었다. 이런 내가 변화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2013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하버드대 학생들이 세계 각국의 학생들을 직접 만나 공부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영상이다. 인상적인 점은 동양인들이 주로 가족과 사회, 더 나아가 국가의 공동체적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공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물론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 수 있겠다).
늦은 밤 소등된 기숙사 침대 위에서 옅은 빛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중국 관묘고 학생들, 허름하고 좁은 공간에서 배움에 대한 의지를 반짝이는 인도 학생들이 힘든 기색 없이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배움 자체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중요한 건 늘 과정보다 결과였다. 좋은 성적은 언제나 가족의 웃음에 보탬이 됐기에.
교과서만 보고 좋은 대학에 갔다는 성공 신화를 믿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는 교과서의 가장 작은 글씨까지 탐독했고, 닥치는 대로 강의를 들었다. 성적은 덤으로 따라왔다.
고3이 되자, 그림을 향한 애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늦깎이 미대 입시생이 됐다. 그림 솜씨는 기대에 한참 못 미쳤고, 한동안 지독한 외사랑의 아픔을 겪는 듯했다. 이 지난한 과정 끝에는 대학이 있으니 참을 수 있었다. 오직 대입이 목적이었다. 당시 주변의 친구들처럼 으레 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통과의례라고 여겼다.
최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온라인으로 확장되면서, 유튜버(크리에이터)가 흔히 초등학생들의 꿈으로 손꼽히는 걸 보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 듯하다. 여전히 수능은 큰일이고, 유별나지만 말이다.
누구인들 항상 공부가 즐거웠을까. 드물게 방송이나, 기사로 공부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곤 하지만 나는 그만한 위인이 아니다. 과목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해서 편식 공부를 하기도 했고 뜻처럼 오르지 않는 성적에 공부를 거부한 적도 있다. 나에게 공부란, 대체로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었다. 그러니 무언가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렇다고 나의 공부가 늘 따분하고 지루한 것은 아니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어린 날의 풍경이 있다. 초등학교 때 조용한 방송실 안에서 바라본 운동장 모습이다. 매일같이 삼삼오오 모여 각종 놀이와 축구 경기를 하던 아이들은 그날따라 아름다워 보였다. 봄을 지나 초여름이 되면서 햇살이 뜨거워진 참이었다.
당시 나는 같은 반 친구가 하는 방송부 일이 너무 멋져 보여서 덜컥 따라 들어갔다. '멋지다'와 '재밌겠다'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시기였다.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일은 그때 더 잘했다. 엉겁결에 시작한 방송부원으로서의 활동은 생각보다 바빴다. 매주 1~2회 아침 방송을 하는 날이면 한 시간을 일찍 집을 나서야 했고 점심시간을 반납하기 일쑤였다(물론 밥은 먹고). 손꼽아 기다리던 운동회 날에도 몇 시간을 가만히 서서 촬영만 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 활동이 좋았다. 카메라 작동법을 익히고, 오디오 기기를 다루며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이 재밌었다. 작은 방송실 공간이 탐구할 대상으로 가득한 별천지 같았다. 간혹 점심시간 동안 교내에 틀 음악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곤 했는데, 그날은 복권 당첨과 같은 날이었다. 작은 권한이었음에도 내가 직접 고른 곡을 아이들이 듣는다는 게 뿌듯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기기 버튼을 꼭 쥐고 음악 소리가 크다 싶으면 내리고, 작다 싶으면 올리기를 반복하면서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다. 나는 그 시간을 오롯이 누렸다.
방송부 경험으로 관련 업무에 뜻이 생겼거나, 기계를 잘 다루게 된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기계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지난날의 경험이 자꾸 눈에 밟히는 이유는 그때 내린 결정과 마음가짐이 지금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간 내가 해 온 공부는 대체로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였다. 타인을 위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그러나 이런 식의 공부는 목적을 이루면 길을 잃기 마련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을 생략한 탓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가치를 두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맛본 성취는 금세 휘발됐다. 나는 아직도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공부는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공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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