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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음 May 10. 2021

글쓰기가 나를 집어삼킬 때

잘 살아야 잘 쓴다

글쓰기가 나를 집어삼킬 때

* 글의 소제목은 강원국 작가님의 강연에서 착안했습니다.


자의식 과잉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글쓰기가 이렇게 두려울 리 없다. 내가 누군가의 독자이듯, 남들도 내 글을 읽을 거란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겁이 늘었다. 어느 순간부터 조회 수가 단지 숫자가 아닌, 사람들의 머릿수로 느껴지는 탓이다.


그래도 마감이 다가오니 애써 노트북을 열고 자판을 두드려 본다. 금세 백스페이스키를 꾹 누른다. 정보도, 관점도, 알맹이도 없는 죽은 글을 썼다는 생각 때문이다. 원점으로 돌아오니 정신이 번뜩 든다. 큰일 났네, 하하. 그러곤 몹쓸 병에 걸린 것처럼 종일 앓아눕는다.


다시금 빈 화면을 마주하고 숨이 턱 막힌다. 시선을 돌리니 제멋대로 자란 손톱이 거슬린다. 손톱을 깎고 거울에 비친 눈썹이 비죽 솟아 있는 걸 발견한다. 곧장 미용 도구를 꺼내 정돈한다. 내친김에 평소에 미루던 책상 청소도 단숨에 끝낸다. 제법 청결해진 느낌이다. 이제 몰입을 방해하는 어떤 요소도 없으니 노트북과 하나 되어 원고를 완성할 차례다. 하지만, 글감을 앞에 두고 마음 깊이 쓰고 싶은 욕구와 맹렬한 거부감이 상충한다. 멍청하게 눈만 끔뻑인다.


이 지경이 되자 남들의 글쓰기가 궁금해졌다. 각종 플랫폼에 '글쓰기'를 키워드로 검색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특히 글쓰기 두려움에 관한 콘텐츠가 눈길을 끌었다. 처음엔 못 쓰겠다는 말을 이렇게 맛있게 썼냐며 배신감이 들었지만, 나름대로 저마다의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꽤 오랜 시간 글을 써오신 분들도 원고와 마감 앞에서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낀다는 이야기에 새삼 놀라웠다. 나 같은 풋내기만 하는 고민이 아니라니. 이런 생각을 눈치챈 듯 유튜브 알고리즘이 관련 콘텐츠를 하나둘 추천했다. 그럼 슬쩍 확인하는 것이 인지상정. 어쩐지 글쓰기를 미뤄두고 글에 관한 지식만 쌓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내 상태를 명확하게 진단해 준 영상을 만났다. 바로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의 '글쓰기의 두려움을 이기는 법'이라는 강연이다.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인 강원국 작가가 대통령의 연설을 쓰면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노하우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사실 그와 나의 경험치가 다르니 큰 기대는 없었는데, 진솔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에 금방 빠져들었다.


그는 26년간 글쓰기로 월급을 받았지만, 여전히 글을 쓸 때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히 청와대에서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는 8년간 매일매일 두려움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글을 집중해서 쓸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해 공유했다.




① 잘 쓰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스스로 마감 시간 정하기

- 자기 아는만큼, 실력만큼 쓰면 쓸 수 있다.


② 자기 암시

- 사람들은 내 글에 (그다지) 관심 없다.

(이게 진짜 뼈 때린다)

- 글이 써지는 순간이 온다는 믿음을 가진다.


③ 몰입하기

- 일단 착수, 한 문장이라도 써둬라

(작동흥분이론: 그래야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 어떤 내용을 쓸지 수시로 생각하라(간절하고 절실하게).


④ 습관의 힘

- 글쓰는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단계를 만들어라).




글쓰기를 즐기지 못하는 순간을 맞닥뜨린 모든 이유가 영상에 있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부끄러움. 과욕을 부린 게 부끄러웠고,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마감을 지키지 못해서 부끄러웠다. 넘치는 소재를 두고 조금도 행동하지 않은 게 부끄러웠다. 또 한편으로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얼마나 명문을 쓰겠다고 이제껏 망설였는지 바보 같았다. 한때는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마감을 마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는데 말이다.


어쩌다 보니 나의 참회록이 되었지만 일단 썼다. 별 내용이 없었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누군가(와 대표님께)에게 참 미안한 일이다(덧붙여 감사하다). 역량만큼 써서 그렇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내 글을 찾아온 사람이라면 해당 영상을 시청해보면 어떨까. 돌처럼 굳었던 손이 저절로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잘' 써보고 싶어서 힘겨워했던 지난날과 미래를 위해 다짐한다. “잘 살아야 잘 쓴다” 강원국 작가님이 강연에서 하신 말씀. 아직 글쓰기 고민에 대해 이보다 명쾌한 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잘 살아야 잘 쓴다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

강원국 작가 글쓰기 강연 | 세바시 9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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